[서소문 사진관] 여고생들의 휴대폰 초기화면이 궁금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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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대문을 열고 세상으로 걸어 나갔다. 요즘은 있는 자리에서 휴대폰을 열어 세상속으로 들어간다. 걸어야만 들어갈 수 있던 세상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아도 손가락만 슬쩍 움직여 너끈히 들어갈 수 있다. 휴대폰의 초기화면은 이를테면 세상으로 들어가는 현관문이다. 요즘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현관문을 어떻게 꾸며 놨을까.

골목길을 보면 그 동네 사람들의 형편이 대략 짐작이 된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이 자신의 의지로 꾸민 현관문을 보면 그들이 누구를 쳐다보고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방년 18세 서울여자고등학교 2학년 4반 여학생들의 동의를 받아 그들의 휴대폰 초기화면을 모아봤다. 좋아하는 가수의 사진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만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의 캐릭터도 적지 않았다. ‘이 사진이 이 학생 맞나?’ 의문이 들만큼 마음먹고 공들여 찍은 자기 자신의 사진도 있었다. 입시공부에 지칠 때 잠시 위안거리가 될 꽃이나 별, 산 등의 사진도 이따금 보였다.

짐작은 했지만, 역시 어머니 아버지의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단 한명의 현실 정치인도, 그 어떤 역사 속 위인의 초상도 없었다. 일년 내내 홍수처럼 쏟아지는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롤모델화 된, 이른바 아이돌과 캐릭터는 별처럼 빛을 내고 있었지만 (존경하지만)늘 일만하는 아버지, (사랑하지만)늘 닦달만하는 어머니, (뭘 하는지)알고 싶지도 않은 정치인, 그리고 (닮고 싶지만)시험답안으로 외워야하는 위인들의 자리는 없었다.

스마트폰의 홍수속에서 폴더형 전화기 2대가 눈길을 잡았다. 이 나이에 이게 무엇인가. 스마트한 시대에 스마트하지 않은 전화기라니. 입시를 위해 오늘 손에 잡히는 편리함을 잠시 유예하자는 부모의 노심초사와 이를 외면하지 않은 자식의 순종을 증거하는 상징아닌가. 잠시 코 끝이 찡했다. 두 대의 폴더형 전화기 중 한 대의 초기화면은 그날의 학습 스케줄이었다. 매일 아침 그날의 일정을 초기화면으로 바꾼다고 했다. 전화기가 아니라 나태해진 자신을 향해 찬물을 확 붓는 일종의 격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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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그런 세상이 있었나 싶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족으로 더 행복한 세상, 정치가 바로 서고, 사표로 삼을 위인이 많아, 연예인 말고도 롤모델이 넘쳐나는 세상, 청소년이 청소년다운 것만으로 충분한 세상을 꿈꾼다. 그때쯤 우리 아이들의 휴대폰 초기화면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으리라.

김춘식 기자 kim.choonsi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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