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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작가 계옥태일씨가 말하는 「성숙의 조건」|한국…15년뒤엔 선진대열에 들수 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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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유단』『단괴의 시대』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까이야·다이이찌」씨는 현실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미래에 대한 정확한 분석으로 성가를 높이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 작가·지성인이다. 사까이야씨는 일본의 경험을 바탕으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한국에 주는 충언을 기고해 왔다.

<박람회 3년전의 정월>
1986년의 한국의 정월을 생각하니 어떤 그리움같은 것이 것이 느껴진다. 내 자신이 깊이 관여했던 대행사, 1970년 일본만국박람회가 열리기 3년전 그때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올림픽3년전」이라는 의미에서 지금의 한국을 1960년대 초기의 일본에 비교하는 사람이 많으나 경제상태·국민의 생활·부흥과 성장의 경위등에서 볼 때 지금의 한국은 60년대 초기의 일본보다는 훨씬 앞서있다.
필시 국민의 자의식이나 국제적 평가도 높으리라.
그같은 실체에 비추어 본다면 지금의 한국은 오히려 보다 규모가 컸던 국제행사, 만국박람회를 3년 앞두고 있던 1968년께의 일본과 비슷하다는 쪽이 옳을 것이다.
당시 일본의 경제규모는 작았다. 그 전해, 그러니까 1967년 일본의 국민총생산은 46조2천억엔, 당시의 환율 l달러대 3백60엔으로 환산하면 1천3백11억달러에 불과했다. 1인당 국민소득도 4백62만엔, 약 1천2백80달러였다. 지금의 한국의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으로 달러표시 물가의 상승률을 고려하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1967년 일본의 수출은 1백4억4천만달러, 수입은 1백16억6천만달러로 재작년(84년)의 한국과 비교하면 수출입 모두 4할을 밑돈다. 무역물가의 상승이 있다고는 하나 일본의 인구가 한국의 2배이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낮은 숫자다.
전후 20년, 오로지 생산시설의 증강에 힘을 기울여온 일본에서는 개인생활이나 사회자본은 엄청나게 뒤처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일본은 지금의 한국과 마찬가지로 「기능올림픽」에서 대량의 금메달을 따왔다.
이같은 경제사회의 발전과 안정을 기초로 3년전에 동경올림픽을 성공시킨 경험을 살려 보다 대규모의 국제행사, 일본만국박람회를 대판에서 열자는 것이 계획되었다.
「사상 최다수의 참가국을 모아 사상 최대의 만국박람회를 열자」, 이것이 이 행사의 제창자이며 기획담당자이기도 했던 나의 목적이었다.
그 즈음 30대 전반이었던 나도 젊었지만 일본사회도 젊었다. 꿈과 희망으로 가슴을 부풀리며 저돌할 수 있는 시대였다.

<경제발전과 한국문화>
일본 만국박람회의 3년전, 1968년께의 일본의 상황은 많은 점에서 지금의 한국과 비슷했다.
일본은 여기까지 이르는데 전후 23년을 요했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경제부흥이 시작된 것을 박정권이 탄생하고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된 1961년이라고 한다면 한국도 거의 같은 정도의 기간에 비슷한 상태까지 온 셈이 된다.
훨씬 어려운 국제환경속에서「세계사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일본의 장기고도성장과 같은 정도의 급격한 발전을 이룩한 것이므로 한국과 한국인의 능력은 비상히 높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신흥공업국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얻은 것은 한국이외에는 싱가포르 등 극히 소수를 헤아릴 수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에서 한국사람들은 커다란 자신과 긍지를 가질 수 있음에 틀림없다.
한국의 이같은 경제발전의 원인, 그것도 몇 가지 점에서는 일본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느끼지만 그 원인중의 첫째는 국민의 근면함과 향상심이다.
한국도, 일본도 넓은 의미에서 동양문화권에 속하고 있고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왔다.
유교, 특히 주자학 이후의 유교는 근면을 존중한다.
다만 일본에 있어서의 유교의 영향은 한국에서처럼 강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았다.
일본은 오랜기간 한국을 유교문화의 선진국으로 삼아왔다. 그것은 실로 l8세기초까지 이른다.
그러나 대륙으로부터 넓은 바다를 격해 있는 섬나라 일본은 대륙문화를 선택해 자기류로 소화할 여지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은 모든 것을 실리적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즉 부모와 떠나 살고 직업의 계속성이 없어지면서 가족의 결속은 소멸하고 직장사회에만 종속하는 「회사인간」이 생겨난 것이다.
오늘날 「특수일본적노사관행」으로 불리는 종신고용·연공서열의 체제가 바로 그런 사실을 대변한다.
이에 비해 강력하면서 순수한 유교문화를 발전시킨 한국에서는 「효」의 대상으로서의 「가」의 사상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동양형 공업사회」의 새로운 모델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공업화에의 도약 완료>
한국의 역사적 불행-그 일부는 일본의 책임이지만-에서 오늘날에는 자본축적의 부족이나 인재의 편재등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해도 앞으로 장기에 걸쳐 한국이 가장 경제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나라라는 것은 확실하다.
한국경제는 공업화에의 테이크 오프(도약)를 완료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15년후인 21세기 초기에는 한국이 극히 유력한 공업국의 하나가 될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그에 따른 걱정도 없는 것이 아니다. 우선 짧은 시점에서 본다면 오늘까지 한국경제성장의 지주가 되어 온 북미시장의 확대가 그리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 반면 아메리카등에 거액의 무역적자가 발생했다.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한국의 공업발전을 위해서는 북미에 대신할 시장이 필요하게 된다. 균형있는 국내 시장을 육성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동시에 현저한 발전을 하고 있는 아시아 각국이 서로 시장을 제공하는 체체가 중요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개성있는 물재」요구>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선진국들의 경제사회의 변화에 지금부터 발전하는 한국의 공업이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는 점이다.
지금 세계의 선진국들은 크게 변화해 가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욕구가 「보다 많은 물재」를 구하기보다도 보다도 「보다 개성적인 물재」 나 「보다 다양한 정보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함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다.
나는 이것을 「지가혁명」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산업혁명이래 2백년만의 대변화」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금후 세계의 소재수요는 그리 늘지 않을 것이고 그 단순 가공품의 수요도 크게 확대되지는 않을 것 같다.
사람들의 지출은 고도기술이나 디자인, 이미지등 「지가」가 높은 물재와 서비스를 지향할 것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의 수요가 급속히 물재를 이탈, 서비스 분야에만 치우치리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하더라도 물재나 서비스의 구성이 각기 소재나 단순노동 분야에서 지가분야로 이동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할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은 앞으로 공업에 힘을 기울이려는 국가들에 대해 유리한 경향은 아니다.
신흥공업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비교적 규격화된 공업제품의 수요가 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세계시장, 특히 선진국시장은 양적 증가보다도 다양화·개성화·정보화를 요구하고 있다.
기술적으로 뛰어날 뿐 아니라 보다 좋은 이미지를 갖춘 상품이 팔리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공업발전을 추진해 나가려면 생산의 양적확대나 기술의 고도화와 함께 디자인의 개량과 이미지의 향상이 필요하다.
한국은 이 양면을 동시평행적으로 추진해 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미술품에는 뛰어난 점이 있다. 예술분야에서 국제적으로 활약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그같은 미술품을 MADE IN KOREA의 이미지에 어떻게 동화시켜 갈 것인가. 앞으로 한국의 커다란 과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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