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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때 건너간 백재문화 규명 기대|후지노끼고적 발굴 둘러본 이웅희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후지노끼(등の목) 고분의 발굴연기는 신중을 기한다는 점에서 환영할만한 것입니다. 발굴이란 어떤 의미에서든 파괴에 속하는 것인데 완벽한 준비후에 조금이라도 손실을 적게해 옛 모습을 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최근 한일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일본 나라(나량)현의 후지노끼고분 발굴현장을 둘러보았다는 재일사학길 이진희씨(56 명지대강사)는 지난15일 감시 서울을 방문, 그의 의견을 이렇게 밝혔다.
가시하라(권원)고고학 연구소는 소규모의 현립연구소로 후지노끼 고분을 단순한 고적분포의 일반조사대상으로 상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엄청난 국보급의 물건이 나와 새 예산과 발굴준비 등으로 애초의 발굴방향을 바꾸어야 했다는 것이 이씨의 전언이다.
지금 일본학계에서 고분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은 그 고분이 그만큼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일본학계에서 신라파 인물의 우덤이나 백제파, 또는 백제도래인의 무덤등 모두한반도와 관련된 인물로 추측이 모아지는 것은 6∼7세기 일본고대사에서 한반도의 영향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본학계에선 최근 무덤의 주인공이 백제파냐, 신나파냐의 문제를 놓고 논의가 활발하다 (본지12월 척일자 6면참조).
『관두껑도 열어보지 않고 그 안에 누가 있을 것이라 단정한다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긴 하나 내 의견은 「소가노이나메」(소아도목·?∼570,백제의 도래인)폭으로 기울고 있읍니다』
이씨는 그 이유로 첫째고분이 횡혈식이라는 점을 든다. 횡혈식모는 고구려에서 백제·신라 전해지는데 이 시기 신라의 중심부에 있는 고분에는 횡혈식을 찾아 볼 수 없으며 6세기 후반에 이런 형태의 묘를 일본에 전할 수 있었던 것 은 백제뿐이라는 것이다. 다음 「이나메」의 아들「우마꼬」(마자)의 무덤으로 알려진 석무대고분과 그 규모는 비록 작지만 아주 닮았다는 점이다.
우무대고분과는 석실의 구조도 같을뿐더러 집모양의석관을 쓴 점도 닮았다. 또 출토된 토기나 마패로 미루어 백제양식이 분명하다는 점, 고분의 축조연대가 「이나메」가 죽은해와 비슷하다는 점등을 들고 있다.
지난14일 X선 촬영 검사 결과 김동마구에서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의 동양사신사상을 상징하는 그림이 더 확인되었는데 이 역시 백제적인 요소를 더 해준 것 에 불과하다는 이씨의 의견이다.
코끼리 무늬는 중국의 남조때 유행한 것인데 남조의 문화는 6세기 전반에 이미 백제에 들어와 있었고 삼국가운데 남조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곳은 역시 백제다. 아직 백제유물에서 코끼리무늬가 발견된 적은 없지만 마패의 귀갑무늬는 6세기전반 무덤인 백제 무령왕능의 왕비 베개와 왕의 큰칼에 이미 새겨져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마패는 백제에서 만들어진 것 이라고 이씨는 밝힌다.
『백제는 6세기전반의 모습까지 우리 앞에 드러나 있으나 아직 6세기 후반과 7세기 초의 모습은 공백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나는 그 석관안에서 백제의 6세기후반을 고증할 중요한 물건과 당시 백제문화의 정화가 살아 나올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씨는 무덤의 주인공이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멸되었거나 아직 발견하지 못한 6세기후반 백제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는 학문적인 기대와 한반도의 일본의 고대문화 교류전수의 역사가운데 한토막이 재조명된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징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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