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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교정상화 20년…최경록 전주일대사에 듣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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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l8일은 한일기본조약이 비준, 발효된지 20돌이다. 해방후 20년만에 국교가 정상화되고 그로부터다시 20년이 흘렀다.
역사적·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두나라간이지만 아직도 「가깝고도 먼나라」라는 서로의 인식이 없는것도 아니다.
80년대전반기는 우리외교에 있어 미결의 장이 가장 많았던 한일관계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던시기다. 바로 이 시기에 주일대사로 5년 2개월간 재직했던 최경록대사(65·현본부대사)를만나 정상화 20년을 맞는 오늘의 한일관계를 물어 보았다.
20년간 살았던 서울창성동 단층한옥 (대지 49평, 건평32평)이 하도 낡아 뜯어고치려했으나 재개발허가가 안나와 집을 팔고 임시로 세든 아파트로 최대사를찾았다.
-국교정상화 20주년을 맞은 오늘의 한일관계를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처럼 한일관계를 튼튼하게다져 놓올수 있는 좋은 시기는 오지 않을겁니다. 재작년 「나까소네」수상이 방한했고 작년엔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 국가원수가 일본을 공식 방문하지 않았읍니까. 두나라관계가 가장 튼튼한 기반위에 전개될수있는 여러가지조건을 갖췄습니다. 앞으로 국제정세의 변화가 올텐데 일본과의 우호토대를 마련해야할 시기는 지금뿐입니다.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과거에 대해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앞으로 한국에 있는 미군이 철수하고 일본에서도 정치적 세대교체가 있으면 우리가 지금처럼 과거의 빚에 대해 큰소리 칠수 있을지를 한번 생각해 봐야합니다.
빚을 받을수있는 지금 좀더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양국관계의 기반을 다져야 합니다. 과거의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기 의해서는 지금 돈독한 기반을 마련해야지요』
그러면서 최대사는 65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은것은 잘못된 것이라 평가했다.
『역사의 빚을 돈으로 계산할수 없습니다. 그 정도의 대금은 다른 나라에서도 빌어올수 있었을텐데 너무 근시안적 자세로 임한것 같다는 생각입다. 국교정상화 이후에도 이문제를 논의할수있었을텐데 당장의 경제적 어려움만 생각했지요』
-80년8월 부임했을때 일본의 대한자세는 어떤것이었습니까.
『당시는 한일관계가 불투명하고 어려울 때였지요. 그래서 대사로 가보라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상당히 망설였지요.
부임해보니 한국에 대해 군사독재가 나온다는등 상당한 오해를 갖고 있었읍니다. 정계 원로들을 만나보면 내 얘기만 듣지 자신들의 소견을 밝히려고 하지않더군요. 그래서 직접 한국에 가보라고 적극 권유했지요.
「후꾸다」(복전)전수상이 방한한뒤 돌아와서 「전대통령은 절대군인이 아니다. 훌륭한 정치가다」라는 소감을 피력했는데 이 일성이 당시의 분위기 개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요. 그때부터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무드가 일고 경협얘기가 나왔지요.
원로가 얘기하면 그걸 그대로 믿고 따라가는 일본정치의 특징이 나타났다고 할까요』
대화가 곧바로 「나까소네」 수상의 방한으로 이어졌다.
『82년11월수상으로 당선된뒤 얼마후에 저녁을 같이했습니다. 「나까소네」수상이 대뜸 자신은 한국을 방문할것이라고 하더군요. 나도 여러차례 권유했지만 그렇게 용기있게 결심을 할줄 몰랐어요.
그전에도 수상의 방한얘기는 있었지만 실현하기 어려운 분위기였읍니다. 「나까소네」수상은 한일관계는 국교정상화로 끝낼것이 아니고 우호를 돈독히 하기위해서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지요.
일본내의 반대도 많았지만 과단성있게 단호한 결심을 한겁니다』
최대사는 전대통렴의 방일로 얘기를 이었다.
『대통령께서 일본을 방문하겠다고 하셔서 처음에는 깜짝 놀랐읍니다. 양국관계의 역사적 특성에 비춰 웬만한 용기와 자기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었지요』
-전대통령의 방일당시 일본국민의 반응은 어떠했읍니까.
『NHK방송이 버스·택시운전사를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면서 전대통령의 방문으로 수입이 줄지 않았느냐, 불편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니까 불평조의 얘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처음 일본에 오는데 일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가게 하는것이 일본국민의 도리가 아니냐는 것이죠.
또 철저한 경호관계로 국민들의 불편이 많았을 텐데 「불평전화」 한통 없었다는 경찰당국의 얘기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국민대 국민의 관계는 절대 나쁜것이 아니었읍니다』
최대사는 이후부터 한국에 대한 고약한 기사도 신문지면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일황이 「한국으로부터의 문학전수」를 언급한후부터 과거 한국문화의 일본이전이 관심을 모으고 있읍니다. 이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과거에 모든 것을 한국으로부터 배웠다고 지도층부터 공공연히 말하고 있습니다.「문화후손」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최근에 조선통신사전에 가보니까 과거에 전혀 보지못했던 그림들이 전시회에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숨겨놨던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문화이전을 해줬다고 강조할필요는 없읍니다. 그러면 받았다해도 안받았다고 하는게 민족감정이니까요』
-한일동반자·신시대가 됐다고하는데 지문날인문제는 왜 쉽게 개선되지 않느냐는 비판이 있습니다. 실질문제가 타결되지 않는다면 동반자 개념은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지문개선문제는 실리적인 접근을 해야 합니다. 5년종신·상시휴대 제도가 처음시행되는만큼 일본에서는 법을 시행하지 않고서는 당장 고치기 어렵다는 주장입니다.
과학이 최고도로 발달한 일본에서 일생 변하지 않는 지문을 경신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면 그들도 대답이 궁색해집니다.
그렇지만 자꾸 떠들면 법을 고치고 싶어도 일본국민들의 반발이 있어 못고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수는 없지만 그래도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고 차분하게 설득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올겁니다.』
-일본은 미국의 개방압력을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나까소네」 수상이 TV에 나와 외국물건을 사라고 세일즈맨을 자처했읍니다. 그걸 보고 국회와 언론에서 야단날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한마디 비판의 소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이 외국물건을 사고있습니다. 우리가 이러면 안된다는 인식을 가진겁니다.
나중에 「나까소네」 수상을 만나 정치적으로 괜찮으냐고 물어보니까 「내가 총리니까 해야한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책임있는 지도자가 말하면 국민이 따라가는 것이 일본의 풍토입니다.
아믛든 이런식으로 하여 미국과의 무역마찰이 크게 줄었지요』
-일본정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거기는 원로정치입니다. 전통을지킵니다. 「나까소네」 수상에게 예전 친구들이 절대 「총리」라는 호칭을 쓰지 않습니다.,
인간과 직책을 연결시키지 않지요. 바로 이 인간관계가 국력의 기만이고 저력입니다. 선배에 대한 예우가 철저하지요.
일본은 민주주의 사회지만 또한 인간관계로 연결돼 있습니다. 정치적인 계산으로 맺어진것이 아닙니다』
그는 또 일본정치가들의 검소함을 들었다.
『「후꾸다」 전수상은 과거 재무성국장때 살던 낡은 집에서 그대로 살고있읍니다. 「나까소네」수상도 그럴겁니다』<박보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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