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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가 사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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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술
JTBC 사회2부 차장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은 기자들과 자주 만나는 편이다. 그는 두산그룹 총수까지 지낸 오너 부자다. 그러나 단골 치킨집에서 격의 없이 맥주잔을 부딪치며 대화를 한다. 송년회 땐 좌석을 일일이 옮겨 다니며 쓴소리를 자청한다. 보통의 총수나 최고경영자(CEO)들과 다르다. 그래서 ‘튄다’거나 ‘정치적’이란 말도 나온다. 하지만 그의 ‘소통’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갈등의 원천인 반감(反感)을 막는 절대 무기가 바로 소통이다. 재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투명한 소통이 뿌리 깊은 ‘반기업 정서’를 없애는 지름길이다. 회사 생존을 책임질 ‘임직원 응집’을 이끌어내는 것도 역시 소통의 힘이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은 아직 서툰 것 같다. 오너·CEO의 생각과 말 한마디에 ‘천만근 무게’가 실려 절대 명제로 이행될 때가 많다. 위쪽의 의중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눈치를 볼 때도 적잖다. 이렇게 수직적이고 제왕적 문화 속에서 임직원들은 자조적·수동적이게 마련이다. 오죽하면 ‘사축(社畜·회사에 가축처럼 매인 신분)’이라는 서글픈 유행어마저 등장했을까.

소통과 결집은 위기 때 더욱 중요하다. 마침 이달 들어 기업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잇따라 경고를 내놓아 주목받고 있다. 권오현 부회장과 윤부근·신종균 사장 등 삼성전자 수뇌부 3인방은 “5~10년 뒤에도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존재할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서든 데스(sudden death·갑작스러운 몰락)’를 우려했다. 각각 내부 게시판과 사내방송의 형식을 빌렸다. 소통 시도는 좋다. 다만 사내 토론 같은 더욱 적극적 방식을 썼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조직원 총의를 경영의 한 부분에 녹여내는 ‘기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기업이 건강해지고, 이윤 창출력도 강화된다.

지난해 ‘일본 경영의 3대 신’이라는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교세라그룹 명예회장을 만났을 때였다. 1시간 인터뷰는 마치 철학 강의 같았다. 그는 “이타심·직원 행복·공유 같은 이른바 ‘필로소피(Philosophy) 경영’의 실천에 기업 미래가 달려 있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지난 1년 사이 소통과 공유의 화두는 더욱 중요해졌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의 원인으로 꼽힐 만큼 심각해진 중산층 붕괴와 양극화를 맞아 기업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총수·CEO·기업들이 힘든 걸 잘 안다. 칡넝쿨 같은 규제와 신산업 파도, 중국의 기세에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그렇다고 소통과 배려·나눔 같은 시대적 의무를 피할 순 없다. 기업들이 이런 일에 적극 나서야 “규제를 풀고, 우리 산업이 더 성장하게 도와달라”고 국회에, 정부에, 그리고 국민에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그게 재계가 사는 길이다. 마침 그동안 취재했던 산업계를 떠나 이번 주부터 JTBC 보도국에서 사회 뉴스를 다루게 됐다. 고발·비리 추적·의혹 제기의 사회 기사에 경영인·기업들 이름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김준술 JTBC 사회2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