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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22 - 예수와 심청은 어떻게 폭풍을 잠재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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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에 해가 떠오르고 있다. 골란 고원의 산등성이 위로 동이 트면 잠에서 깨어난 새들이 하늘을 가른다.

갈릴리 호수는 부드럽다. 동 틀 녘과 해질 녘이 특히 그렇다. 불그스름한 노을에 호수가 파스텔톤으로 물들면, 물새들이 수면을 가른다. 그럼 멀리 나갔던 배들이 호수 위에 기다란 물살 자국을 남기며 부두로 돌아온다. 평화롭기 짝이 없다. 그런 갈릴리 호수도 구름이 끼고 돌풍이 불면 달라진다. 순식간에 파도가 넘실대는 시퍼런 바다로 변한다.

. 배가 작으니 파도가 치면 이리저리 기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풍랑이 몰아칠 때는 어땠을까. 어부들은 목숨을 걸기도 했을 터이다. 갈릴리 호수의 둘레는 63㎞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호수의 이쪽과 저쪽을 오갈 때 종종 배를 탔다. 걸어서 가려면 호수를 빙 돌아가야 했다. 배를 타는 게 훨씬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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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배가 갈릴리 호수의 물살을 가르고 있다. 지금은 모터를 쓰지만 예수 당시에는 노를 젓거나 돛을 썼을 터이다.

그날도 예수는 제자들과 배를 탔다. 그런데 호수에 큰 풍랑이 일었다. 넘실대는 파도가 배 위를 덮쳤다. 거센 파도 속에서 배는 위태롭게 기우뚱거렸다. 마가복음에는 ‘물이 배에 거의 차게 되었다’(4장37절)고 적혀 있다. 그 와중에도 예수는 자고 있었다. 그날도 하루 종일 메시지를 전하고, 마음이 아픈 이들을 어루만지고, 몸이 아픈 이들을 돌보았을 터이다. 그런 일과를 마치고 배에 올라탄 예수는 곯아 떨어졌다.

상황은 심각했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한 말은 이랬다.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복음 8장25절) 제자들이 ‘죽음’을 거론할 정도였다. 바다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예수는 눈을 떴다. 예수는 오히려 호들갑떠는 제자들을 나무랐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자리에서 일어선 예수는 바람과 호수를 향해 꾸짖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성경에는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마태복음 8장26절)고 기록돼 있다. 배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복음 8장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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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화가 루돌프 바쿠이젠(1630~1808)의 작품 ‘갈릴리 호수의 폭풍 속에 있는 예수’. 오른편으로 멀리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던 성곽도 보인다.

갈릴리 호숫가로 갔다. 호수는 잠잠했다. “갈릴리 호수의 파도가 높아질 때도 있느냐?”고 물었을 때 숙소의 유대인 직원은 “돌풍이 불면 갈릴리 호가 돌변한다. 그때는 배도 출항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저 어디쯤이었을까. 몰아치는 바람과 울어대는 호수를 향해 예수가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가복음 4장39절)하고 꾸짖은 곳이 말이다.

호숫가에는 피크닉 공간이 있었다. 풀밭에 파라솔도 설치돼 있었다. 거기에 앉았다. 바로 앞에 갈릴리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궁금했다. 배가 뒤집어 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깨웠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가복음 5장38절) 그렇게 물었다. 배가 침몰할 지경이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묻지 않았을까. 그런데 예수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가복음 4장40절)고 나무랐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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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 주변의 피크닉 공간. 동네 주민들은 차를 가져와 주차한 뒤 피크닉 장소에서 음식을 먹기도 했다. ‘수영금지’라고 쓴 팻말이 보인다.

비단 갈릴리 호수뿐만 아니다. 우리의 삶에도 바람이 분다. 수시로 돌풍이 몰아친다. 그때마다 파도가 친다. 나의 일상, 나의 생활이 파도에 뒤덮인다. 우리는 예수를 깨운다. 어깨를 이리저리 흔들며 소리친다. “제가 죽게 생겼습니다. 걱정되지도 않습니까?”그럴 때도 예수는 눈을 뜨며 말한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호숫가를 거닐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렇다. 우리는 파도다. 이리 철썩, 저리 철썩.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씩 출렁이는 파도다. 아침 출근길에 옆차가 끼어들 때도 출렁이고, 차가 막혀서 결국 지각할 때도 출렁인다. 직장 상사에게 불려가 한 소리 들을 때도 출렁이고, 집에 돌아가 배우자와 말다툼을 할 때도 출렁인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게 파도의 일생이라고. 어쩔 수 없다고. 세상에 출렁이지 않는 파도가 어디에 있느냐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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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에 파도가 일고 있다. 세상의 모든 파도는 출렁인다. 그게 파도의 삶이다. 예수는 그런 삶을 잠잠하게 했다.

풀밭에 앉았다. 나는 요한복음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복음 1장5절)

무슨 뜻일까. 빛은 늘 어둠 속에 있다. 다만 어둠이 빛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어둡다. 빛이 없어서 어두운 게 아니다. 빛이 있는데도 보지 못해 어두울 뿐이다. 그걸 뒤집으면 어찌 될까. 우리의 어둠 속에는 ‘희망’이 숨어 있다. 우리의 절망 속에는 ‘희망’이 숨어 있다. 빛이 이미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아 날마다 허덕대는 그 짙은 절망 속에 이미 빛이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이 구절은 ‘파도’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파도는 두렵다. 겁이 난다. 불안하다. 왜 그럴까. 자기 안의 ‘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도 속에도 이미 빛이 있다. 그러나 파도는 그 빛을 보지 못한다. 파도 속에서 빛나는 빛. 그게 대체 뭘까. 다름 아닌 ‘바다’다. 요한복음 1장5절에 대입하면 이렇게 된다.

‘그 바다가 파도 속에서 출렁이고 있지만
파도는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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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브루겔의 1596년작 ‘갈릴리 호수의 폭풍 속 예수’. 제자들이 모두 혼비백산할 때 예수는 흔들림없이 잠을 청할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일까.

돌풍이 몰아치고 배가 흔들렸을 때 제자들은 왜 겁을 냈을까.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왜 몸을 떨었을까. 그들 각자가 파도이기 때문이다. 자기 안의 바다를 보지 못하는 파도는 두렵다. 부서질까봐, 소멸 될까봐, 죽게 될까봐 겁이 난다. 그래서 외친다.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어로는 ‘죽게 되다’가 ‘아폴루메사(apollumetha)’다. ‘파괴되다(being destroyed)’‘소멸 되다(be perishing)’는 뜻이다. 제자들은 자신이 소멸 되는 파도가 될까봐 두려워했다.

예수는 달랐다. 겁을 내지도 않았다.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제자들을 나무랐다. 왜 그랬을까. 예수의 눈에는 ‘파도 속의 바다’가 보이기 때문이다. ‘어둠 속의 빛’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높고 거센 파도가 몰아쳐도 예수는 개의치 않는다. 파도는 그저 바다일 뿐이다. 부서질 일도 없고, 소멸 될 일도 없다. 그래서 예수는 쿨쿨 잠을 잘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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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작품. 그림에는 폭풍과 파도가 몰아친다. 제자들도 두려움에 떤다. 예수가 잠을 자는 모습만 예외다. 그야말로 ‘폭풍 속에 깃든 고요’다.

눈을 뜬 예수는 오히려 바람과 호수를 꾸짖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우리의 삶도 그렇다. 시도 때도 없이 몰아치는 파도만 봐도 힘이 든다. 그러나 파도 속에 이미 바다가 있음을 알면 달라진다. 더 이상 떨 필요도 없고, 더 이상 겁낼 필요도 없다. 그럴 때 삶이 잠잠해진다. 조용해진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어둠 속의 빛을 보고, 파도 속의 바다를 보는 일. 붓다는 그걸 어떻게 표현했을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붓다는 그렇게 표현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고요해진다. 바람이 불 때도, 파도가 때릴 때도, 천둥이 내려칠 때도 고요 속에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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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의 작품 ‘유혹을 잠재우는 예수’. 예수는 몰아치는 폭풍과 파도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외쳤다. 그의 내면이 이미 잠잠하고 고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울어대는 바람과 날뛰는 호수를 향해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고 했다. 영어로는 “Be silent! be still!’이다. 단순히 파도의 어깨를 두드려서 잠시 진정시키는 게 ‘Be silent’가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지속가능한 삶의 고요를 만들 수가 없다. 예수가 말한 삶의 고요는 그보다 더 크고, 그보다 더 깊다. 왜 그럴까. 어둠이 자기 안의 빛을 보기 때문이다. 파도가 자기 안의 바다를 보기 때문이다. 그럴 때 드러나는 고요는 무한히 깊다.

마가복음의 영어 성경을 보면 ‘고요의 정체’가 더욱 명확해진다. 예수가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고 하자 마가복음은 ‘아주 고요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어로는 ‘there came a great calm’이다. 단순한 고요가 아니다. ‘거대한 고요(a great calm)’다. 그리스어 성경에는 ‘galene(calm) megas(great)’로 돼 있다. 세상의 고요가 다 ‘거대한 고요’는 아니다. 파도가 자기 안의 바다를 볼 때 비로소 ‘거대한 고요’가 밀려온다. 어둠이 자기 안의 빛을 볼 때 비로소 ‘거대한 고요’가 드러난다. 그때 우리의 삶도 잠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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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의 물결이 잔잔하다. 고요하다. 그러나 언제 바람이 불고 파도가 때릴지 모른다. 예수가 말한 고요는 모든 폭풍과 파도를 품어버리는 ‘거대한 고요’다.

『심청전』의 바다도 갈릴리의 바다와 통한다. 심봉사는 앞을 못 본다. 장님이다. 그에게 세상은 어둠이다. 심봉사가 처음부터 장님은 아니었다. 그는 황주땅 도화동의 이름난 유학자였다. 서른이 되기 전에 병에 걸려 장님이 되었다. 무슨 뜻일까. 본래부터 어둠만 있던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빛이 있었다. 그러다 어둠이 되었다. 그래서 캄캄한 어둠 속에도 빛이 들어가 있다. 다만 어둠이 빛을 보지 못할 뿐이다.

파도는 어디에서 생겨날까. 그렇다. 바다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둘의 속성이 하나다. 그런데 바다에서 ‘툭’ 떨어져 공중으로 솟구친 파도는 바다를 잊어버린다. 자신이 어디에서 생겨났고,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망각하게 된다. 그게 예수의 제자들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김OO’‘이XX’‘박△△’란 이름의 한 조각 파도가 되자마자 바다를 잊고 만다. 그들의 세상에는 바다는 없고 파도만 있을 뿐이다.

심청도 그랬다. 심청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었다. 무슨 뜻일까. 파도는 바다에서 ‘툭’ 튀어나오자마자 바다를 여읜다. 자신이 태어난 근원을 상실한다. 어머니를 잃은 심청이 그걸 상징한다. 그래서 파도는 두렵다. 불안하고 겁이 난다. 폭풍이 몰아칠 때는 더하다. 사라질까봐, 죽게 될까봐 파도는 덜덜 떤다. 예수의 눈에는 보인다. 그 이유가 빤히 보인다. 파도가 ‘자기 안의 바다’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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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작품 ‘갈릴리 호수 폭풍 속의 그리스도’. 집채만한 파도에 배가 기우뚱한다.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가 사실적이다. 제자들이 잠을 자는 예수를 깨우고 있다. 고개를 들고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의 눈이 말한다.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겠느냐?”

심봉사는 개울을 건너다가 물에 빠졌다. 지나가던 화주승이 구해주었다. 그는 “명월당 운심동 개법당 부처님께 공양미 300석을 바치면 눈을 뜬다”고 일러주었다. 심봉사는 덜컥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법당 이름이 눈길을 끈다. ‘개법당(開法堂)’. 개법(開法). 무슨 뜻일까. ‘이치가 열린다’는 뜻이다. 이치가 열릴 때 어둠이 열린다. 그래야 빛이 드러난다. 그게 ‘개법(開法)’이다. 그런데 어둠은 거저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화주승은 공양미 300석을 바치라고 했다. 단순한 금전적 수치가 아니다. 그건 ‘심청의 목숨’을 뜻한다.

파도가 자기 안의 바다를 보려면 어찌해야 할까. ‘나는 파도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허물어야 한다. 그래서 심청은 중국 난징(南京)을 오가는 뱃사람에게 목숨을 판다. 그게 십자가다. 어둠이 빛을 찾고, 파도가 바다를 찾기 위해 짊어지는 심청의 ‘자기 십자가’다. 쉽지는 않다. 바다를 모르는 한 조각 파도에게 그건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심청은 배를 탔다. 배는 서해로 떠났다. 아니나다를까. 풍랑이 몰아친다. 집채만한 파도가 몰려온다. 뱃전을 ‘탕! 탕!’ 친다. 큰 배가 휘청휘청한다. 폭풍은 으르렁거리며 달려든다. 심청의 마음이 요동친다. 덩달아 파도도 출렁인다. 심청과 파도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자 뱃사람이 외친다. “여보시오, 심낭자! 얼른 물에 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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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발레단의 창작발레 ‘심청’의 한 장면. 뱃전으로 달려간 심청이 공중에 떠올라 바다로 떨어지는 모습이다.

때가 왔다. 파도가 자신을 허물 때가 왔다. 심청은 두 눈을 ‘딱!’ 감는다. 그리고 뱃머리로 달려간다. 심청은 발을 뗀다. 뱃전에서 공중으로 몸이 뜬다. 파도는 그렇게 공중으로 솟구친다. 판소리에서는 그 대목을 ‘기러기 낙수(落水)격’이라고 묘사한다. 그렇게 떨어진다. 하늘로 솟구친 파도가 바다를 향해 기러기처럼 거꾸로 곤두박질한다.

‘풍덩!’하고 심청이 물에 빠진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하늘을 삼킬 듯이 몰아치던 폭풍, 바다를 삼킬 듯이 달려들던 파도가 ‘촤~악!’ 가라앉는다. 순식간에 잠이 든다. 방금까지도 ‘으르렁! 쾅쾅!’하며 달려들던 기세는 온데간데없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고요(a great calm)’가 드러난다. 왜 그럴까. 파도가 바다를 만났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파도가 ‘자기 안의 바다’를 깨닫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심청이 용궁을 거쳐 다시 세상으로 나올 때는 연꽃을 타고 나타난다. 왜 연꽃일까. 물에 젖지 않기 때문이다. 연꽃은 폭풍 속에 있으면서도 흔들림이 없고, 파도 속에 있으면서도 물듦이 없다. 그게 ‘거대한 고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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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당수에 빠진 심청이 용궁을 거쳐 다시 세상으로 올라온다. 심청은 왜 연꽃 속에서 나왔을까. ‘거대한 고요’를 얻은 이는 진흙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갈릴리 호숫가를 걸었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파도의 삶은 유한하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마찬가지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심청전』에도 ‘갈릴리 호수’가 녹아 있다. 왜 그럴까. 우리의 일상, 우리의 생활, 우리의 삶이 바로 갈릴리 호수이기 때문이다. 그 위로 수시로 돌풍이 분다. 파도가 친다. 뒤집힐 듯 배가 기우뚱한다. 갑판으로 파도가 덮칠 때는 죽을 것만 같다. 그때마다 예수는 우리에게 묻는다.

“네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파도인가, 아니면 바다인가.”

철썩거리는 갈릴리 호수의 파도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요한복음이 떠올랐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복음 1장5절)

“그 바다가 파도 속에서 출렁이고 있지만
파도는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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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지날 때면 갈릴리 호수에 기다란 물살이 그려진다. 그 물살을 따라 파도가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눈에는 무엇이 보일까. 파도일까, 아니면 바다일까.

<23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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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페이스북 주소 : www.facebook.com/baiksu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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