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강아지 엄마 강은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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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강은엽 선생의 인터뷰 통보에 개가 떠올랐다.
분명 강선생은 조각가 이지만 내 머릿속엔 ‘강아지 엄마’라 각인되어 있는 탓이다.
최근 강선생이 책을 냈다고 했다.
제목이 『개와 꽃과 친구가 있는 날』이었다.
역시나 개와 관련이 있었다.

강선생을 처음 만난 게 8년 전이었다.
‘조각가 강은엽’이 아니라 ‘강아지 엄마 강은엽’이 인터뷰의 주제였다.
의왕시 청계산 자락에 있는 강선생의 집으로 찾아갔다.
문밖에서 본 단독주택, 번듯했다.
그런데 집안에 들어서자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열 마리 남짓의 개들이 마당부터 집안까지 활보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개를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의 개들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고작 하루 시간 내어 찾아간 터에도 정신이 사나울 정도인데 이들과 함께 사는 강선생은 오죽할까 싶었다.

오죽할까 싶은 건 단지 내 생각일 뿐이란 것을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강선생에겐 모두 자식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버려진 얘들을 데려와서 돌보는 것이었다.
한 술 더 떠 집마저도 개와 함께 살기 위해 설계를 따로 하여 지은 집이었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인터뷰 후 동네 애들 밥과 물을 주러 가야 한다고 했다.
강선생이 말한 동네 애들은 동네 개들이었다.
함께 사는 개만 해도 무려 열 마리 남짓이었다.
그런데 온 동네 개들까지 챙긴다고 하니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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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와 물을 차에 싣고 나서는 강선생을 따라나섰다.
주인의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동네 개들뿐 만 아니었다.
산속에 내쳐진 개들까지 챙겼다.
물과 사료를 들고 산길을 마다하지 않는 일흔의 조각가,
강선생이 ‘강아지 엄마’로 불리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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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이 지나 인터뷰 통보를 받자마자 개가 떠오른 게 이때 각인된 모습 때문이었다.
다시 그 집 앞에 섰다.
입구엔 두 마리의 개가 졸고 있었다.

8년 만에 다시 뵙는다고 강선생에게 인사를 건넸다.
강선생도 금세 기억해냈다.
“아! 누룽지와 함께 사진 찍어 주신 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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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의 이름이 누룽지였다.
난 그냥 개로 기억했을 뿐인데 강선생에겐 이름이 있는 자식이었다.
자리에 앉아 누룽지 이야기를 이었다.
“2009년에 누룽지가 하늘로 갔어요. 골수암이었어요. 방에 유골단지를 모셔두었죠. 내가 죽으면 같이 묻어달라고 해놓았어요.”

짠했다.
사실 누룽지는 동물병원 문 앞에 피투성이로 버려진 유기견이었다.
피투성이를 거두어 키웠더니 금세 체중이 40㎏이 될 만큼 자랐다고 했다.
당시 살던 아파트에서 돌보기 힘들 정도로 자란 게다.
그래서 누룽지와 함께 살기 위해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지은 것이었다.

강선생이 유기견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된 것도,
나아가 동물보호단체 카라(KARA)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도 누룽지로 인해 비롯된 것이었다.
“사람이 저질러 놓은 일, 사람이 거두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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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룽지와의 인연이 시작된 게 1996년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곁에 품고 마음에 묻고 살아온 게 자그마치 20년인 게다.
진정한 반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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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생이 누룽지 이야기를 끝내고 지금 함께 사는 개들의 사연을 들려줬다.
렙스토피라에 감염된 남의 집 개,
청계산 떠돌이 개,
실내 생활이 낯설어 걸핏하면 담장 넘는 개,
하나하나가 기구한 사연이 있는 개들이었다.
모두 열두 마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 개들을 마당으로 데리고 나왔다.
나오자마자 한 마리가 담장을 넘어 탈출을 해버렸다.
그리고 게 중 한 마리가 유독 내게 이빨을 드러냈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으면 다가와 으르렁거리기까지 했다.
무서웠다.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으르렁 이었다.
계속 사진을 찍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내 발 밑에 와있었다.
깜짝 놀랐다.
강선생이 목을 쓰다듬어 주라고 했다.
그렇게 했다.
그때부터 도통 떨어지지 않았다.
카메라만 들면 사진을 못 찍게 몸을 비비며 응석을 부렸다.
그 얘에게 필요한 건 관심이었음을 알았다.
그때 강선생이 말했다.
“자식 키우는 것과 다름없어요, 개들도 감사함을 알아요. 핥고 비비며 그렇게 표현하죠. 남을 도와주면 당신이 행복해지듯 그들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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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마리의 개와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런데 맘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죄다 딴청이었다.
딱 한 얘만 예외였다.
뛰어오르며 재롱을 피우고, 안기어 핥고, 등에 올라타기까지 했다.
내게 이빨을 드러내다가 몸을 비비며 응석을 부렸던 바로 그 애였다.
이름이 씩씩이라고 했다.
청계산 떠돌이 어미에게서 태어난 것을 강선생이 젖병으로 키웠다고 했다.
영락없는 엄마와 자식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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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생이 두 번의 허리 디스크 수술로 이젠 일하기 벅차다고 했다.
8년 전에도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런데도 물과 사료를 들고 산길을 올랐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강선생을 언제 또 다시 만날지는 모른다.
하지만 또 다시 만나더라도 지금과 그다지 달라져 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강선생은 그 애들의 엄마이기에 그럴 것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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