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NG] [Book] 우리 학교 보건 선생님은 퇴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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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정세랑 지음, 민음사)


살다보면 가벼운 사람을 만난다. 가벼운 사람들은 대체로 두 부류로 나뉜다. 머리에 든 게 아무것도 없거나, 너무 많은 일을 겪어 가벼워진 사람. ‘보건교사 안은영’은 후자와 같은 책이다. 사실 제목에서 기대한 것은 하얀 가운을 입은 보건 선생님 안은영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 정도였다. 학교의 보건실, 그리고 선생님이라는 코드는 책에서도 말하듯 ‘호러’의 영역이 아니라 ‘에로’의 영역에 가까우니까 말이다. 그런데 웬걸, 보건실의 여신인줄 알았던 주인공은 무지개 색 늘어나는 깔때기형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을 무기로 삼는 퇴마사였다. 하지만 ‘퇴마사’라고 단정 짓기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보건교사'라고 하는 게 안은영에 대한 적확한 설명일 테다.

그런데 이 학교에 에로에로 젤리들 말고, 학생들 목에 뭔가를 박는 사악한 무엇이 있다. 어쩐지 발을 들이는 순간 음습하더라니. 꼬인 팔자는 어디 가지 않는다.

가운 안, 허리 뒤쪽으로 비비탄 총과 장난감 칼을 꽂고 은영은 보건실을 나섰다. - p.15

유년시절부터 안은영이 지닌 ‘재능’은 축복이라기보다 저주였다.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며 살아왔기에 종종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웬만하면 별난 일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니 다른 사람들은 그를 나사 빠진 사람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안은영은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세상을 피해 다니기보다, 하고픈 말은 참지 않는 ‘잘 자란’ 성인이 되었다. 부끄러울법한 순간에도 얼굴이 빨개지기는커녕 도리어 능청맞아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숨만 쉬고 있어도 멘탈이 털리는 시대에 ‘자존감을 지닌 어른’이 얼마나 귀한지 알기에, 지금의 안은영을 있게 한 그 능력은 축복일 수도 있겠다. 이처럼 그가 지닌 가벼움은 머리에 든 게 아무것도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누구보다 우여곡절 많은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해가 갈수록 더 느끼는 점이지만 사람이 직업을 고르는 게 아니라 직업이 사람을 고르는 것 같다. 사명 같은 단어를 기본적으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수긍하고 받아들였다기보단 수월한 인생을 사는 걸 일찌감치 포기했다는 게 맞겠다. -p.15

일찌감치 수월하게 사는 것을 ‘포기’한 안은영에게서는 체념보다 용기의 가치가 더 와 닿는다. 이는 정유정의 ‘내 심장을 쏴라’의 핵심과 유사하다. 작가의 말을 통해 정유정은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정세랑의 안은영은 자신의 숙명이 삶을 침몰시키기 전에 스스로를 구원한다. 안은영이 ‘셜록’이라면 ‘왓슨’처럼 그를 돕는 한문교사 홍인표도 마찬가지다.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사고로 인해 다리가 성치 않다. 처지를 핑계로 들어 유산으로 놀고먹는 삶을 택할 수도 있었는데 홍인표는 교사가 되었다.

저주에 가까운 재능을 받아들인 안은영과 불운을 탓하지 않는 홍인표는 스스로의 삶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열등감, 첫사랑, 소외감 등 '보건교사 안은영'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누구나 한번쯤 겪어 봤을 사춘기의 감정을 대표한다. 캐릭터로 구현된 그 시절의 정서는 아이들의 심리가 '질풍노도의 시기'나 '중2병'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리기에는 복잡하고 입체적인 문제라는 것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작가는 아이들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고, '한국의 고등학교'라는 배경이 기저에 깔려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나라, 그리고 그 사회의 고등학교에서 우리는 용암 같은 화두가 들끓는 것을 매일같이 봐 오지 않았는가.

고등학생이면 벌써 다 큰 것 같지만 그래도 비이성적인 상황에서 어른들을 그만큼 잘 믿기도 힘들다. 믿지 말아야 할 어른들까지 철석같이 믿어 버린다. -p.38

사는 것도 혼란스러운 나이에 죽어서, 미처 그 죽음의 상태에도 익숙해지지 못한 채 엉뚱한 곳에 뜯겨 온 아이였다. 눈앞에서 아이의 옷이 찢어지기도 했고 여기저기 멍이 나타나기도 했고 피를 뱉거나 얼굴에 반점이 생기기도 했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울고 있었다. 그 변화들만으로는 왜 죽었는지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은영은 그런 죽음을 싫어했다. 때 이르고 폭력적인 죽음 말이다. -p.81

'비싸서 그래. 사람보다 크레인이. 그래서 낡은 크레인을 계속 쓰는 거야. 검사를 하긴 하는데 무조건 통과더라.'

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값없게 느껴졌다. -p.189

“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한테도 선거권이 있어.”

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나을 거야. 그러니까 그 바보 같은 교과서를 막길 잘했어. -p.233

안은영 또한 한국의 고등학생이었다. 남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그의 트라우마였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고 문제와 마주함으로써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보건교사가 된 안은영이 학교에서 대면하는 문제들은 대부분 외면하고 싶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면하지 않는 안은영,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이들을 구해내는 그는 히어로임이 분명하다. 영웅의 가치가 바닥에 떨어지고, 이 세상에 그런 존재는 있을 수 없다고 부정되는 현실에서 안은영의 캐릭터가 유치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물은 홍인표도 다른 누구도 아닌 안은영일 테다. 부정적인 현실을 마주하는 용기, 그것이 오늘날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p.265

책의 마지막에 홍인표는 외친다. 도망치자고. 안은영이 지고 있는 짐을 놓을지라도 그 누구도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말이다. 홍인표가 하는 말은 안은영 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외치는 말처럼 들린다.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너무 많은 것을 짊어졌고, 그 시기가 끝났음에도 여전히 물에 젖은 솜이불 같은 무거운 현실 아래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우리에게 외치는 위로 같다. 당신이 지금 짊어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우리를 질타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안은영을 보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다시 한 번 잘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오른다. 마주해야만 얻을 수 있는 가벼운 삶이 있다는 것, 안은영은 그런 삶을 증명해냈고, 그 자체였으니까.

글=김재영 인턴기자 t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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