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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비극을 덮어둘 수 없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이병주씨의 원효로자택 서재는 국내서적과 영·불·일어 등 외서, 그리고 한서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30평정도의 서재에 2만여권의 책이 있다고 했다. 이씨와 그의 작품 『지리산』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책숲속의 적요는 마치 지리산 깊숙한 곳의 고요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작품 『지리산』의 줄거리는 해방 전 일제에 항거하여 지리산에 들어간 젊은이들이 해방 후 서울 등지로 나가 남로당에 가입하고 6·25를 전후하여 다시 지리산에 돌아와 파르티잔이 되어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는 또 이들의 결정과 행동에 대해 충고하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나타납니다. 해방 전부터 6·25이후까지 우리민족사의 한 중요한 시기를 기록하는 작품이라 여겨집니다.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한 것, 또 쓰게된 동기는.
▲이병주=해방과 6·25를 전후하여 지리산에서는 2만여명이 죽어갔습니다.
파르티잔과 군·경 토벌대들인 이들은 대부분이 젊은이들이었지요. 돌변하는 시대가 낳은 민족의 비극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든 간에 또 파르티잔의 상당수가 잘못 선택한 길을 갔든지에 그들의 죽음은 민족과 시대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되어야합니다. 2만의 생명이 죽어간 것을 그냥 묻어버린다는 것은 기록과 문자가 있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들의 일이 가슴에 호소하는 그 무엇으로 남겨져야합니다.
-그 비극적 기간동안 지리산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세계사적으로 동서의 이데올로기가 집중적으로 대치한 곳이며 그것이 우리민족의 비극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선생님은 경남 하동 출신으로, 또 그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으로서 이 작품을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느껴집니다.
▲하동은 지리산에서 가까워 나는 지리산을 고향으로 하고 있는 작가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당시를 상당히 고뇌하며 보냈습니다. 『지리산』에 등장하는 인물들 하준규(본명 하준수)·박태영(본명 박범수)하영근(본명 하영진)씨 등은 선배·동창이 되는 실존인물들로 함께 고뇌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 하영진씨는 지금 80세가 넘어 생존해있고 박범수의 아들도 최근 만났습니다. 그들에 대한 개인적인 애착이 이 소설을 쓰게 한 요인이 됩니다. 그들은 내 청춘을 수놓은 큰을이 된 사람들입니다.
-『지리산』에는 이선생님이 분신이라 생각되는 인물이 두 사람 등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규·김경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의 개인사와 작중의 일들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규·김경주는 같이 이데올로기문제에 직접 뛰어들기보다는 보다 넓은 눈으로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자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선생님은 해방 전 지리산에 들어가 오래 있은 일이 있습니까. 작중의 이규처럼….
▲아닙니다. 나는 학병에 나갔으며 그것은 작품 『관부연락선』에 나타나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번 『지리산』과 『남로당』 등의 소설에서 남로당을 완전히 실패한 노선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실패한 것이 교훈이 되어 발전하는 경우도 있으나 남로당은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폭동·반란 등으로 자체세력을 소멸시켰으며 민중의 가슴에 허망만을 남겼습니다. 해방의 혼돈기에 그들은 정치는 현실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미국이 점령한 지역 안에서 공산주의운동에 대해 그들은 한달 앞에 있을 일에 대한 예측조차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예견과 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허망의 정열」이라는 말을 이 작품 속에서 자주 쓰셨군요.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지 못한 허망한 정열이었지요.
-선생님은 작중인물의 묘사나 남로당에 대한 소설전개에 부족한 점이 있다고 보고 다른 작품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한사람이 모든 것을 다할 수 없으며 작품은 비판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E·H·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대화』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말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지리산』은 「세대」지에 연재되다가 77년 중단되었고 이번에 완성했습니다.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그때보다는 작품을 쓸 수 있는 여건이 좋아졌습니다. 또 이런 것도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작품을 쓰는 작가의 무게 말입니다.
이병주가 썼기 때문에 괜찮다 이런 것이 있겠지요.(이씨는 허허 웃으면서 오해가 없도록 썼으면 좋겠다고 일했다)
-『지리산』과 같은 소재를 다루는 것은 항상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역사에만 모든 것을 맡길 수 없지 않겠습니까. 역사는 승리자 중심이고 결과만 따집니다. 문학은 역사가 못 다한 것을 표현합니다. 패배자에게도 발언권을 주고 동기에도 조명을 합니다. 역사의 틈새에 있는 민족의 애환을 그려나가는 것으로서 문학이 중요합니다.
-『지리산』은 기록문학이라고 보여집니다. 어느 정도가 사실이고 어느 정도가 픽션입니까.
▲80%정도는 있었던 일입니다. 초기의 일은 내가 듣고 본 것, 또 사람들을 만난 것이고 파르티잔 이후는 그에 관한 기록자료를 입수하였습니다.
-기록자료가 많다면 후속작품도 있을 것 같습니다.
▲토벌대쪽의 기록으로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만들어 보려하고 있습니다.
-『지리산』에는 지리산의 구석구석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지리산을 어느 정도 아시는지요.
▲지리산에는 조부의 묘소가 있습니다. 작품의 앞부분에 나오는 무덤을 찾아가는 이야기도 나의 이야기입니다.
지리산의 지리·역사·생태계 등에 대해 직접 가보고 또 진주에 있을 때 제자들과 함께 연구한 것이 한 권의 책이 될 만큼 모여있습니다. 정리하여 출판할 계획입니다.
-작품 『지리산』을 완결 지은 심정은 어떠십니까.
▲내가 잘 알았던 사람들의 일이고 민족의 비극이었기 때문에 꼭 써야겠다고 속이 부글대었습니다. 방치할 수는 없는 것이었지요. 노력한 만큼 다 드러내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5·16이후 뒤늦게 소설을 시작하셨습니다. 작가로의 변신은 어떻게….
▲5·l6이후 고초를 겪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작가로 만들었지요. 교사 아니면 언론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데뷔작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머리 속에서 익어가던 것이라 1주일만에 5백장을 써내었습니다.
-지금까지 책은 몇 권 내었습니까.
▲작품으로는 80여편, 책으로는 1백권이 넘었군요. 앞으로의 문학은 기록성이 강한 것이 많으리라고 봅니다. 심층취재의 저널리즘이라 할까요. 기록과 정감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문제지요.
-작품의 수준이 들쭉날쭉하다는 지적이 더러 있는데요.
▲지금까지 『나는 프로작가다. 따라서 작품을 많이 써야한다』하는 생각을 가져왔습니다. 또 솔직히 말하자면 주문생산도 많이 했지요. 이게 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습니다.(웃음) 요즘 와서 『작가는 절대로 바빠서는 안 된다. 게을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철같은 의지를 가져야한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나이가 많은 사람은 의리를 지키려면 무리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작품 쓰는 일과 관련하여 나름대로 뜻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쓸 계획입니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같은 철학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임재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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