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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바뀐다] 中. 연예인 기획사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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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참 좋아졌죠. 전에는 ‘들어와’한마디면 방송사에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지금은 ‘왜요’‘바빠서 안되겠는데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오히려 PD들이 룸살롱에서 매니저에게 술 사면서 목 매는 경우까지 있죠. 불과 10년, 아니 3·4년 전만 해도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모 스타 연기자 매니저)

방송사 PD가 연예인 위에 군림한다는 건 옛말이다. 스타 캐스팅이 드라마는 물론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좌지우지하다 보니 PD가 상위였던 수직적인 권력관계가 수평관계, 아니 오히려 역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스타 개개인의 영향력이 커진 탓도 있지만 그 뒤에는 연예기획사의 힘이 버티고 있다.

'토마토'(SBS) 이후로 영화에만 출연했던 김희선은 다음달 시작하는 '요조숙녀'(SBS)로 4년 만에 TV에 돌아온다. 김희선의 드라마 출연은 그가 속한 기획사가 이 드라마를 외주제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기획사가 자사 소속 스타를 내세워 아예 드라마를 외주 제작하는 건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직접 제작에 나서지 않더라도 기획사가 소위 '패키지'로 소속 연예인을 무더기로 출연시키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스타가 있는 기획사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차기작 대본이 손에 들어오기 때문에 조연 자리에 소속사 신인을 끼워넣는 조건으로 캐스팅에 응하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 O.S.T 역시 당연히 소속사 가수가 맡는다. 당초 '올인'(SBS)의 주제가는 어떤 톱 가수에게 먼저 제의했다가 결국 주인공 송혜교와 같은 소속사인 박용하가 불렀다.

'끼워넣기'는 드라마에만 있는 게 아니다.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패널에서부터 심지어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인터뷰까지 끼워넣기가 성행한다.

한 연예전문 리포터는 "5년 전만 해도 마이크만 들이대면 누구나 인터뷰를 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우리 소속사 신인 누구누구 인터뷰 안해주면 이 인터뷰 못한다'는 매니저가 늘었다"고 말한다. 이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고는 원하는 스타의 인터뷰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들어준다고 한다.

모 기획사 매니저는 "연예기획사가 엄청난 액수의 계약금에다 심하면 연기자 9대 기획사 1의 불공정한 수익 배분 조건을 걸고서라도 무리하게 스타와 계약을 할 수밖에 없는 건 스타 없이 기획사를 꾸릴 수 없는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스타를 팔아 신인을 키운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다. 최근 몇몇 대형 기획사가 공중분해된 것도 당장의 외형 키우기에 급급한 탓이 크다. 스타를 끌어들이기 위해 들어간 돈에 비해 당장 손에 쥔 돈은 미미하기 때문이다.

한 매니저는 연예기획사를 '모래성'에 비유했다. "외형만 그럴 듯하지 속을 들춰보면 부실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최근 손꼽히는 대형 기획사인 GM기획이 일본 벤처기업에 1백60억원을 받고 매각됐다는 소식도 이 바닥에서는 곧이 곧대로 믿는 분위기가 아니다.

부풀려진 부분이 많긴 해도 방송사와 기획사의 힘의 균형이 기획사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캐스팅 권한은 여전히 PD에게 있지만 기획사의 입김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KBS 모 간부는 "나쁘게 말하면 끼워넣기지만 좋게 말하면 상부상조"라고 말한다. 힘들 때 한번 밀어주고 거꾸로 도움이 필요할 때 확실히 지분을 챙긴다는 것.

연예기획사와 방송사는 서로가 서로를 봐주면서 상승효과를 보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폐해는 시청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신인 연예인의 시시콜콜한 정보를 들어야 하고, 모든 프로그램에서 늘 보는 얼굴을 만나야 한다.

몇몇 개그맨이 오락프로그램 MC를 독식하고, 그들과 한솥밥을 먹는 덜 유명한 연예인이 패널로 나와 출연료를 가져가는 것도 기획사의 입김이 작용한 경우다. 당초 한 유명 개그맨과 공동 MC를 맡기로 했던 한 아나운서는 비중있는 기획사의 다른 개그맨이 끼어들면서 튕겨나가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연예인들은 기획사에 몸담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지경이다. 한 공채 출신 개그맨은 "기획사에 속하지 않으면 아예 출연할 기회가 원천봉쇄된다"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지금까지는 기획사로의 권력이동이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측면이 강조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스타 개개인이 아닌 스타시스템이 확고하게 자리잡으면서 스타라는 막강한 문화상품을 해외로 수출하는 등 연예산업의 발전으로 이어갈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고 있다. 과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두고볼 일이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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