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영국 없는 신EU 시대, 프랑코-저먼 동맹 더 강해진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86호 4 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어수선한 가운데 1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치열했던 프랑스 북부 솜 전투 발발 100주년을 맞아 데이비드 캐 머런 영국 총리,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윌리엄 영국 왕세손,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빈(왼쪽부터)이 티에프발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했다. 4개월간 계속된 솜 전투에서 독일군과 영국군 100만여 명이 전사했다. [AP=뉴시스]

지난달 23일(현지시간) 국민투표로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Brexit)를 결정한 이후 영국은 이미 EU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영국이 탈퇴 협상 개시를 통보하는 수순인 리스본조약 50조 발동을 이르면 내년 초에 할 예정이어서 몸은 여전히 EU 안에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연합에서 제외된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지난달 29일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의 이틀째 날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를 제외한 27개국 정상들만 모여 비공개로 회의가 진행됐다. 캐머런 총리로선 자신이 참석하는 마지막 EU 정상회의가 된 셈이다. 영국이 이처럼 더 이상 EU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됨에 따라 ‘영국 없는 신(新)EU’ 시대가 사실상 개막됐다고 봐야 한다.


신EU 시대는 명암이 교차하고 있다. 영국이 빠진 EU는 위상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고 영국에 이어 다른 회원국들도 뛰쳐나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는 것이 어두운 면이다. 반면 브렉시트가 결정됨으로써 불확실성이 사라져 EU가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는 희망 섞인 의견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국 없는 신EU’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발목 잡던 영국 빠져 입지 강화EU의 쌍두마차라 불리는 프랑코-저먼(Franco-German·프랑스와 독일) 동맹의 리더십은 예전보다 탄탄해질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는 EU의 전신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1951) 창설 멤버로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 유럽을 디자인한 주역이다. 두 나라는 ECSC 출범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의 유럽’이란 목표를 향해 두 손을 맞잡고 일로매진해 왔다. 세계 5위 경제대국이자 유럽에서 독일에 이어 둘째로 경제규모가 큰 영국의 빈자리마저 메워야 하는 프랑스와 독일로선 오히려 책임감이 더 막중해졌다고 볼 수 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브렉시트로 유럽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올랑드 대통령은 “프랑스와 독일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은 의무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지난달 29일엔 브뤼셀에서 “유럽의 종말을 찾는 이들에게 영국 사례는 하나의 교훈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랑스 내에서 반이민 정서에 편승해 득세하고 있는 극우정당 국민전선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달 29일 “영국을 친구이자 파트너로 보는 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단은 신중한 자세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전날엔 “과실만 따먹어서는 안 된다”며 영국의 무임승차 불가론을 확실히 했다. 메르켈 총리는 “가족에서 탈퇴하기를 원하는 누구라도 특권만 누리고 의무는 하지 않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회원국 의무를 다하지 않는 한 EU 단일시장에 접근할 권한은 없다”고 강조했다.


EU가 내세우는 ‘보다 긴밀한 연합(ever closer union)’에 적극적인 프랑코-저먼 동맹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특별 지위를 요구해 왔던 영국의 EU 탈퇴로 향후 행보가 더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다. 알리안츠그룹의 무함마드 엘에리언 수석 경제고문은 “EU를 떠나는 국가들이 앞으로 더 나타날 수 있겠지만 EU는 프랑스와 독일의 확고한 협력 관계 속에서 더 조화롭고 안정된 형태를 갖출 것”이라고 평가했다(미국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


프랑코-저먼 동맹이 신EU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대대적 개혁이 불가피해 보인다. EU는 그동안 브렉시트를 막기 위해 영국의 EU 내 ‘특별 지위’를 인정하는 등 총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영국의 무리한 요구도 다 들어줬지만 정작 영국인의 마음을 사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보다 긴밀한 연합’보다는 더 유연하고 지속 가능성이 있는 연합을 위한 방안이 나와야 한다는 지적이다.


차제에 EU 통합의 속도와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요구도 나온다. 특히 새로 EU에 가입한 동유럽 국가들은 국경정책과 난민수용 문제 등에 개별 정부가 더 많은 통제권한을 유지하기를 원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우리는 난민 사태와 관련해 스스로 정한 정책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며 “EU는 난민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AP통신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폴란드 등 동유럽 4개국이 점점 목소리를 높이고 더 이상의 EU 통합을 원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독일·프랑스와 함께 ECSC 창설 멤버인 이탈리아의 마테오 렌치 총리는 지난달 27일 “브렉시트로 촉발된 EU의 위기는 오히려 유럽에는 가장 큰 기회가 될 수도 있다”며 “우리는 수세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멈추고 유럽이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EU는 이제 사회적인 의제에 좀 더 집중하고 관료적인 이슈에는 조금 덜 신경을 써야 한다”고 주문했다.


유럽 통합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헬무트 콜 전 통일 독일 총리는 빌트지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은 숨 고르기를 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훈수했다. 콜 전 총리는 “불필요한 강경함과 성급함보다는 신중함이 요구된다”며 “EU가 지금 문을 닫는 것은 큰 실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더 많은 중앙집중과 획일성보다 회원국의 정체성과 역사의 다양성을 고려한 개혁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넥시트·첵시트·덴시트라 불리는 네덜란드·체코·덴마크 등의 EU 탈퇴를 저지하는 것도 주축국인 프랑스와 독일의 우선 과제다. ECSC 공동 창설국인 네덜란드·이탈리아 등에서도 반EU 정서가 확산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헤이르트 빌더르스가 이끄는 극우정당인 자유당이 EU 탈퇴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렉시트(Grexit) 일보 직전까지 갔던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의 소외감을 덜어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터키와의 EU 가입 협상 재개 새 도전 될 듯지난달 30일 재개된 터키와의 EU 가입 협상도 신EU 체제의 큰 도전으로 작용할 것이다. 영국에선 브렉시트 국민투표 직전 터키의 EU 가입을 놓고 큰 논쟁이 벌어졌다. 이슬람 국가 터키가 EU에 가입하면 많게는 1200만 명이 영국에 들어올 것이라는 ‘과장된’ 주장을 놓고 치열한 공방이 펼쳐졌다. 다른 회원국 중에도 이를 문제 삼는 세력이 많다.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독일 주도의 통합 확대 움직임에 부정적인 세력도 강하다. 두 나라의 통합 드라이브가 결국 브렉시트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비판론이 제기된다. 리처드 하스 미 외교협회(CFR) 회장은 “몇 개 국가가 추가로 EU를 떠나면서 EU는 핵심이 되는 소수 정예 국가들의 결합으로 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U를 주도하고 있지만 프랑스와 독일조차도 국내에서 ‘유럽 통합에 회의적인(Eurosceptic)’ 세력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당장에 내년 초 프랑스 대선과 내년 가을 독일 총선이 그 시험대다.


내년 4월 23일 치러지는 프랑스 대선 1차 투표에선 반EU 선봉에 나선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당수의 돌풍이 예상된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일인 23일 발표된 프랑스 경제지 레제코의 여론조사에서 르펜은 상대 당에서 누가 나오더라도 결선투표(5월 7일)에 진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전선은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26%의 득표율로 제1당이 됐으며 지난해 12월 지방선거 1차 투표에서도 득표율 1위를 기록했다. 르펜 당수는 내년 대선 1차 투표는 통과하지만 결선 투표에서는 우파 후보에게 모두 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도좌파 사회당의 올랑드 대통령은 1차 투표에서 3위에 머물 것으로 예상됐다.


영국과의 탈퇴 협상 기나긴 ‘밀당’ 예상지난해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기로 해 곤욕을 치른 메르켈 독일 총리가 내년 총선에서 4선에 도전할지는 불투명하다. 반난민, 국경통제를 주장하는 신생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독일대안당)’의 도전이 거세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대안당은 13%의 지지율로 제3당인 녹색당과 비슷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독일대안당은 16개 주의회 중 8개 주의회에 진출해 있다. 만약 내년 총선에서 독일대안당이 연방의회(분데스탁)에까지 진입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인 정치적 사건이 될 수 있다.


독일과 프랑스가 중심이 되는 EU는 향후 영국과의 탈퇴 협상에서 기나긴 ‘밀당’을 해야 한다. 영국의 친브렉시트 지도자들은 EU 단일시장 접근과 이민 억제를 위한 이동의 자유 통제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EU는 영국이 이동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을 경우 단일시장 접근을 차단할 방침을 내비쳤다.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지난달 29일 비공식 정상회의를 마친 뒤 “회원국 정상들은 단일시장 접근권을 얻으려면 EU의 ‘상품·사람·자본·서비스 이동의 자유’를 수용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말했다. 영국을 제외한 27개 EU 회원국 정상들은 오는 9월 16일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다시 회동해 영국의 EU 탈퇴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브렉시트가 기정사실화하면서 유럽 대륙은 국제정치뿐 아니라 경제·금융·군사·안보 등 제반 분야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미답의 길을 걷게 됐다. 프랑코-저먼 동맹이 신EU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유럽은 물론 전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