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1>제84화 올림픽 반세기-김성집<10>-좌절된 베를린 출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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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936년 2월 29일 밤 조선일보 강당. 제 11회 「세계 올림픽 역기(역도) 예선 대회」가 역사를 자부하는 젊은이와 수많은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벌어졌다. 1936년은 베를린 올림픽이 열리는 해였고 더구나 역도는 첫 출전 예선 대회였으므로 체육계의 관심이 대단했다.
나는 당시 휘문고보 5학년으로 17세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나는 역도 중체급에서는 국내 최고 기록을 갖고 있었으므로 도전자가 별로 없었다.
경기는 중체급·경체급·경경체급 등 3체급으로 나뉘어 벌어졌다. 나는 중체급에서 추상 2백 30, 인상 2백, 용상 2백 70파운드를 들어 합계 7백 파운드(3백 17.5kg)로 당당히 우승했다. 추상 기록은 0.5파운드를 경신한 세계 신기록이었다.
이날 경체급에서는 김용성, 경경체급에서는 남수일이 각각 우승, 나와 함께 3명이 조선 대표로 확정됐다.
경기도중 막간을 이용, 「쌀섬들기」 관중 경기가 벌어져 1등 강사에게 쌀 1가마가 상품으로 주어지는 등 역사들의 잔치는 흥겹고 화기가 넘쳤다.
우리 3명은 그 해 5월 31일 일본 동경에서 열리는 제l회 전 역기 선수권 대회 겸 베를린 올림픽 파견 예선 대회에 출전, 일본 선수와 겨루게 됐다.
출전에 앞서 국내 신문은 나를 가리켜 「조선이 낳은 소년 역사」라고 칭송하며 걱려했다.
출발 직전 남수일이 불운하게도 맹장 수술을 받는 바람에 출전을 포기, 일본엔 나와 김용성 둘만이 가게 됐다.
우리는 서상천 선생이 어렵게 마련해 준 여비를 쥐고 역도 도장 선배인 이종호씨(당시 일본중앙대학 유학생)를 따라 첫 해외 원정길에 올랐다.
동경 YMCA회관에 숙소를 정한 우리는 곧바로 체육관을 찾아 연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이 대회에서 정식 경기를 벌여 보지도 못하고 나라 없는 국민의 비애를 맛보아야 했다.
당시 일본은 첫 전국 대회를 벌일 정도로·역도 경기 수준이 형편없었다. 일본측은 나의 연습 광경을 보고 놀란 나머지 내가 18세 미만의 미성년자라는 이유를 붙여 번외 경기에만 출전하도록 결정해 버렸다.
본선 중체급 경기에서 일본 선수는 2백 62.5kg을 들어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번외 경기에 출전한 나는 그보다 55kg이나 많은 3백 17.5kg을 들어 일본인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다.
32년 LA올림픽 5위 기록이 3백 5kg이었으니까 이 기록이라면 충분히 4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경체급의 김용성은 2백 97.5kg으로 가볍게 1위를 차지했다.
남수일도 이 대회에 참가했었더라면 충분히 경경체급을 석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 선수들이 우리들에게 압도당해 신통한 성적을 올리지 못하자 일본측은 당초 방침을 바꿔 베를린 올림픽에 역도 종목은 출전하지 않고 조사 연구원만 보내기로 결정해버렸다.
일본 선수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는 일본 역도 연맹과 체육회 등에 쫓아가 항의했으나 『출전 신청이 너무 늦었다』고 핑계를 대며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식민지 국민의 서글픔과 허탈한 마음으로 귀국, 서울역에 도착하니 마라톤의 손기정이 환송객들의 격려를 받으며 일본으로 떠나는 길이었다.
일장기 아래일망정 올림픽에 출전하는 손을 보며 나는 착잡한 감회를 금할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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