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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가 만난 사람] ‘구글 출신 VC’ 한국계 데이비드 리"제 2의 우버·에어비앤비 헬스케어서 나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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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지난 21일(현지시간) 세계 바이오 제약계의 시선이 미국 국립보건원(NIH)에 집중됐다. 인간의 세포로 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CRISPR-Cas9)로 암환자 치료 연구를 하겠다는 미국 펜실베니아대의 요청을 NIH가 승인한 것이다. 약이 아니라 암 환자의 유전자 구조를 편집해 암을 치료하겠다는 시도는 인류 역사상 처음이다.

구글, 유튜브 활용 자율차 만들듯
IT 뒤흔든 SW, 헬스케어에 접목
5~10년 후 획기적 진보 있을 것

이 연구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이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억만장자인 숀 파커다. 그는 P2P(개인간) 음원 거래 시대를 연 냅스터의 창업자이자 전 페이스북 사장이다. 파커의 투자로 실리콘밸리의 ‘바이오·헬스케어 러시’(rush)가 다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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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리

이런 흐름의 복판에 선 유명 벤처투자자(VC)가 있다. 한국계 미국인인 데이비드 리(46) 리팩터 캐피탈 대표다. 구글 출신으로 2009년부터 실리콘밸리에서 엔젤투자자로 이름을 날린 그는 올 3월 헬스케어 분야에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VC ‘리팩터 캐피탈’을 설립했다. 22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스파크랩스’의 행사 참석차 방한한 그를 만났다.

데이비드 리는 “파커 같은 엄청난 인플루언서(influencer·영향력 있는 개인)이자 창업가가 헬스케어 분야에 투자하는 게 최근 실리콘밸리의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와 함께 구글에서 일했던 케이티 스탠튼 전 트위터 부사장도 구글 출신이 창업한 유전자분석 스타트업 ‘칼라 지노믹스’로 이직했다는 소식도 전했다. 돈과 사람이 헬스케어 분야로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헬스케어 산업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중요한 데도 여전히 못 풀고 있는 문제가 많은 영역”이라며 “풀지 못한 문제가 많을 수록 기회도 많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소프트웨어의 힘을 헬스케어에 접목하는 데 주목한다. 그는 “소프트웨어가 접목되면 기존에 복잡하게 얽혀있던 문제들을 더 쉽게, 더 효과적으로, 더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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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팩터 캐피탈이라는 회사 이름에도 이런 취지가 담겨있다. 리팩터(Refactor)란 기존에 짜여진 컴퓨터 코드(Code)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한 채 코드를 더 단순하게 재구조화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는 “헬스케어에서 소프트웨어를 통해 변화를 만들어 낼 창업자들에게 투자하겠다는 뜻이 회사 이름에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리 대표는 또한 “헬스케어 분야 외에도 교육·금융·농업 같은 의미 있지만 혁신이 더딘 분야의 스타트업을 발굴해 투자할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그는 “이제는 소프트웨어와 데이터 과학이 결합하면 기존 약물보다 암을 더 잘 치료하고 진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구글이 자율주행차를 먼저 만들 수 있었던 건 유튜브가 전세계에서 모은 이미지 데이터를 확보했고, 이를 분석하는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헬스케어도 (데이터 과학이 결합하면) 그런 혁신이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이어서 “생물학과 소프트웨어·데이터의 융합 이 앞으로 큰 화두가 될 것”이라며 “앞으로 5년, 10년 후쯤엔 획기적인 진보(breakthroughs)가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미국에선 헬스케어 분야에서 다양한 스타트업이 등장하고 있다. 구글이 투자한 ‘23앤미’나 ‘알루미나’ 같은 유전자분석업체부터 보험과 기술을 결합한 ‘오스카인슈어런스’. 여러 약물의 치료결과 데이터를 분석해 환자 별로 최적의 암 치료법을 찾아주는 ‘노터블랩스’ 등 다양하다.

특히 유전자 분석기술은 가격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대중화 시대를 맞았다. 데이비드 리는 "2007년 이후 유전자분석에 드는 비용이 무어의 법칙보다 7배 빠른 속도로 급격히 떨어졌다”며 "이젠 100달러 이하에 누구나 자신의 유전자를 분석할 수 있을 만큼 시장이 커졌다”고 말했다.

무어의 법칙이란 반도체의 성능이 18개월마다 두 배가 된다는 법칙으로, 정보기술(IT)의 진보를 상징한다. 국내에서도 이번 6월 말부터 고객들이 병원을 거치지 않고도 민간 유전자분석업체를 통해 검사를 받을 수 있게 되면서 유전자 분석 시장이 커지고 있다.

데이비드 리는 “대표적 공유경제 업체인 ‘우버’나 ‘에어비앤비’가 지금과 같은 엄청난 가치를 인정받게 될 지 5년 전엔 아무도 모른 것처럼 헬스케어도 비슷하다”며 “특히 미국에선 규제와 정책의 변화가 헬스케어 소프트웨어 기업 창업자들에게 엄청난 기회로 떠올랐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헬스케어 산업이 성장하려면 좋은 데이터가 많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스타트업 창업자들에 대한 조언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나 창업하지 말라”며 “내 경쟁자에겐 없고 내게는 있는 게 무엇인지 따져보고 자신의 강점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창업을 하라”고 말했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남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밤 12시에 깨서도 회사 생각을 하며 살 수 있어야 창업자”라며 “특별히 남들과 다른 걸 갖지 않았다면 창업하기 보단 그런 창업자들이 있는 회사에 합류하면서 배워라”고 말했다.

그는 또 “크게 성장하는 창업자들은 대체로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헬스케어만 해도 보험자·의사·환자·정부 등 이해 관계자가 많고 복잡한 영역이지만,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고 내가 만들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재빨리 움직이는 이들이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그는 한국의 창업 생태계에 대해 “한국은 정부가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나라로 유명한데, 실패한 창업자가 많을수록 성공 사례가 나올 확률이 높아지는 만큼 실패는 비즈니스의 비용이라 생각하고 꾸준히 지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데이비드 리

한국계 미국인으로 존스홉킨스대에서 물리학·수학을,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석사)을 전공했고 뉴욕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구글에 2003년 합류해 신사업 개발팀 초기 멤버로 일하다가 2009년 벤처투자자로 변신했다. 구글·페이스북에 초기 투자했던 실리콘밸리의 유명 엔젤투자자 론 콘웨이와 ‘SV엔젤’을 설립, 400여 개의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그가 초기 투자한 대표적 기업으론 트위터·에어비앤비·핀터레스트·스냅챗·징가·드롭박스 등이 있다. 한국에선 비트코인 스타트업 ‘코빗’과 인공지능 로봇개발사 ‘아카’가 그의 투자를 받았다.

유전자 가위

세포 속 특정 유전자를 도려내는 유전자 짜깁기 기술. 특정 단백질이 유전자에 화학반응을 일으켜 가위로 자르는 효과를 내는 유전자 교정(genome editing) 기술 중 하나다. 영국 정부는 최근 개발된 3세대 유전자 가위인 크리스퍼 가위(CRISPER Cas9)로 인간 배아를 교정하는 연구를 허용했고, 중국은 이미 비슷한 연구를 진행해 논란이 됐다. 국내에선 기초과학연구원(IBS) 김진수 단장 팀이 유전자 가위 기술로 혈우병 치료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박수련 기자 park.sury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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