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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잇고’ 부른 박혜나, 초록마녀로 다시 날아오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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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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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배우의 반란. 뮤지컬 ‘위키드’의 앙상블 오디션에 지원했다 덜컥 주인공이 된 박혜나.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어느덧 30대에 접어든 무명 배우는 막막했다. “오디션 볼 때마다 떨어져 ‘난 오디션이 취미’라고 했어요. 아마 10번쯤 계속 미끄러졌나.” 그때 뮤지컬 ‘위키드’ 공고가 났다. “여배우의 로망이죠. 밑져야 본전이니 앙상블(단역)이라도 되면 좋겠다면서 무작정 달려갔어요.”

소극장 무대만 서던 무명 배우
3년 전 ‘위키드’ 서바이벌 오디션
노래 실력 인정받아 깜짝 스타로

아니나 다를까, 오디션 첫날 춤만 추라고 하더니 돌아가란다. “떨어졌거나 잘해봤자 주요 배역은 아니라는 뜻이잖아요.” 근데 다음날 지정곡을 부르게 했다. 며칠 뒤 호출하곤 오디션을 또 보잔다. 또 춤 추고, 또 노래하고…. 그렇게 일곱번이나 심사위원 앞에 섰다. “마지막땐 집에 가는데 다시 오라는 거에요. 근데 끝까지 대사는 안 시키는 거 있죠. 날 갖고 장난하나 싶었어요.”

그건 서바이벌 오디션처럼 출연진을 추려내는 과정이었다. 그는 처음엔 앙상블 후보 중 하나였다. 이후 스윙(여러 배역을 소화하는 것) 배우군에 합류했고, 여주인공 언더(대역)로 발탁되더니 마침내 진짜 여주인공이 됐다. 드라마 같은 스토리, 바로 뮤지컬 배우 박혜나(34) 얘기다.

그 박혜나가 다시 초록마녀로 돌아온다. 다음달 12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는 ‘위키드’의 타이틀롤 ‘엘파바’를 연기한다. 3년전 옥주현과 나란히 섰다면, 이번엔 ‘캣츠맘’ 차지연과 더블 캐스팅됐다. “초연 프리미엄도 없나 봐요, 또 오디션 보래요 내 참. 솔직히 더 쫄리는 거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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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중 엘파바 역으로 분한 모습.

2013년 ‘위키드’ 전까진 무명이었는데.
“지금도 유명하진 않다.(웃음) 2006년 데뷔했으니 벌써 10년이다. 한 작품 했다고 갑자기 인생이 달라지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때도 주변에선 무척 기뻐하고 우는 친구도 있었는데 난 덤덤했다. 가족은 더했다. 소식 전했더니 ‘아 그래? 음… 밥 먹자’하더라.”
‘위키드’가 본인으로선 첫 대형 뮤지컬이다.
“이전까지 소극장 창작 뮤지컬만 주로 했다. 전격 캐스팅된 데엔 오리지널 ‘엘파바’의 음색과 비슷한 덕을 본 게 아닌가 싶다. 사실 2013년 ‘위키드’ 개막 일주일전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렛잇고(let it go)’ 한국 버전을 녹음했다. 그땐 그 노래가 얼마나 유명한 곡인지 모르고, 돈을 벌어야 하니 알바한다는 마음으로 스튜디오에 갔다. 근데 녹음한 걸 디즈니에 보내 승인을 받는, 일종의 오디션이라는 거다. 아무 생각없이 불렀는데 덜컥 됐다. 알아보니 미국 OST에서 엘사역을 맡은 이가 2003년 ‘위키드’ 브로드웨이 초연때 ‘엘파바’를 연기한 이리나 멘델이었다. 멘델과 내가 여러면에서 겹쳤던 모양이다.”
단지 음색 때문에?
“글쎄, 미국 음악감독이 이 얘기는 해줬다. ‘네 안에 엘파바가 보였다’고. 차별받던 엘파바가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지 않던가. 나 역시 무명을 벗어나고픈 간절함이 왜 없었겠나. 잘 안 풀리니 ‘내가 못난 탓’이라며 자책을 많이 했고, ‘음악 선생이 되면 어떨까’라며 기웃거리기도 했고, 아예 몇개월 집에 갇혀 끙끙 앓기도 했다. 그런 폭풍이 지나고 나니 조금 내려놓게 되더라. 그리곤 오디션에 떨어져도 ‘내가 못한 게 아니라 나랑 안 맞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됐다. 그때쯤 엘파바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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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뮤지컬 배우가 됐나.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언니 둘은 그냥 평범하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끼도 없었고 튀는 걸 끔찍히 싫어했다. 근데 노래하는 것만은 무척 좋아했다. 공부도 썩 잘하는 편이 아니라 대학을 떨어졌는데, 재수하다 ‘노래와 춤, 연기를 몽땅 가르쳐 드립니다’는 광고를 보게 됐다. 그 길로 아카데미에 등록해 결국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지금도 나 혼자 연습하는 건 행복하지만, 남들 앞에 서는 건 여전히 두렵다.”
작년에 결혼했는데.
“2년반 가량 연애했다. 남편 역시 뮤지컬 배우(김찬호)다. 밝은 성격이라 나의 어두운 면이 조금 환해진 거 같다. 그러고 보니 더블 캐스팅된 차지연 언니랑 비슷한 게 많다. 결혼 시기(지난해 11월)도, 직업(부부가 다 뮤지컬 배우)도, 연상연하 커플인 것도. 아! 난 한 살 차이다. 언니(네 살 차)처럼 뻔뻔하진 않다. 하하”

글=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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