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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녹은 땅에 텃밭·양떼 전통 개썰매 사냥 사라져 온난화는 위기이자 기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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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호 4 면

1 경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그린란드의 관광 중심지 일루리사트 전경. 앞바다에는 아이스피오르 빙하에서 흘러나온 빙산이 떠 있다.

2 그린란드의 항공교통 중심지인 캉거루수아크 공항에는 북극점과 세계 주요 도시까지 소요되는 비행 시간을 알려주는 간판이 서 있다. 최정동 기자

지구온난화에 따른 환경 변화는 그린란드를 비롯한 북극 지역 주민들에게는 위기이자 기회다. 그린란드의 경우 어업과 관광이 활성화되고 광산 개발도 시작됐다. 지난달 17일 막을 올린 북극서클포럼(Arctic Circle Forum)에서 킴 킬센 그린란드 총리는 기조연설을 통해 “북극 지방 원주민들은 어업·광산·관광·인프라를 중심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며 “최근 국제적 관심을 끌고 있는 극지역에 국내외의 적극적인 투자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구온난화는 북극 주민들의 삶을 어떻게 변모시키고 있을까. 취재팀은 그린란드 남부 카시아수크에서 만난 주부 엘렌 프레데릭슨과 유네스코 아이스피오르 사무실의 매니저인 프레데릭 레너트를 인터뷰했다. 그 내용을 ‘내러티브 리포트’로 재구성했다.

그린란드 남부 카시아수크에서 양을 기르며 살아가는 이누이트 프레데릭슨 가족. 오른쪽부터 어머니 엘렌과 손자·아들이다. 최정동 기자

# 카시아수크의 주부 프레데릭슨(5월 16일)제 이름은 엘렌 프레데릭슨(57)입니다. 누크에서 남쪽으로 500㎞ 떨어진 작은 마을 카시아수크에서 남편 칼, 아들 셋과 함께 양을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을의 인구는 120명가량 됩니다. 한 달 전 시아버지 에릭 더 레드 프레드릭슨이 돌아가셨는데 여러 도시에서 손님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기자들도 여럿 왔었지요.


시아버지는 에릭 더 레드, 그냥 ‘붉은 털 에릭’으로 불렸죠. 1000년 전 아이슬란드를 떠나 그린란드에 처음 정착한 바이킹의 이름과 같습니다. 그는 일족을 데리고 피오르를 따라 들어간 내륙의 갯마을 카시아수크에 정착했지만 400여 년 뒤 마을 흔적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고 전해옵니다.


우리는 바이킹 붉은 털 에릭의 후예는 아닙니다. 우리 조상은 그린란드에서 사냥과 물고기 잡이를 하며 수천 년간 살아온 이누이트입니다. 시할아버지인 오토 프레데릭슨이 1924년 아무도 살지 않던 이곳에 정착해 시아버지를 낳았다고 해요. 처음 정착한 바이킹을 기리는 뜻으로, 카시아수크에서 태어난 첫 이누이트인 아들 이름을 에릭 더 레드라고 지었답니다.


시할아버지 오토는 바이킹 붉은 털 에릭처럼 선구자였지요. 그린란드에서 처음으로 양을 키우신 분입니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오던 수렵의 전통을 버리고 목축업으로 돌아선 그린란드 첫 이누이트인 셈이죠. 그때부터 키워 온 양떼는 이제 600마리 넘게 불어났지요. 마을 사람들도 대부분 양을 키웁니다. 이곳에서 목양(牧羊)이 가능해진 것도 날이 갈수록 따뜻해지고 있는 날씨 때문입니다. 5~8월까지는 양의 먹이가 되는 목초를 키울 수 있고 집 앞 텃밭 양지바른 곳엔 감자와 채소도 재배하죠. 옛날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겠죠.


하지만 최근 들어 걱정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는 차원을 넘어 종잡을 수 없게 변덕을 부리니까요. 올해는 5월 초부터 눈이 녹기 시작하더군요. 지난해보다 무려 한 달은 이른 거죠. 5월 한때 낮 기온이 17도까지 오른 적도 있어요. 문제는 기온이 오르면서 비가 점점 안 온다는 겁니다. 더운 날씨에 건조해지니 풀이 자라지 않아 몇 년째 덴마크에서 목초를 수입하고 있어요. 앞으로 더 건조해지면 양을 기르는 것도 어려워질까 걱정이네요.


사족 같지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우리를 “이누이트”라고 불러달라는 겁니다. 에스키모는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란 비하하는 뜻이 담겨 있지만 이누이트는 그냥 ‘인간’이란 뜻의 순우리말이죠. 우리 조상은 아시아에서 왔다고 해요. 아이들의 엉덩이엔 푸른 점이 있고, 내 어머니는 미역국도 끓여주셨답니다.


# 일루리사트에서 만난 레너트(5월 20일)저는 유네스코 아이스피오르 사무실의 매니저인 프레데릭 레너트입니다. 아이스피오르 빙하는 2004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덕분에 일루리사트는 그린란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됐습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급격하게 환경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빙하가 빙원에서 떨어져 나오는 지점(calving front)은 2001년에서 2010년 사이 15㎞ 이상 후퇴했습니다.


일루리사트 앞바다의 경우 80년대 후반에는 11월부터 다음해 5~6월까지 2m 두께로 얼어 붙어 배를 통한 물자 조달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예년보다 여름이 한 달이나 먼저 찾아왔습니다. 이누이트 사냥도 보통 5월까지 가능했지만 최근에는 4월이면 사냥 활동이 끝납니다. 이누이트들은 개썰매로 빙하 위를 돌아다니며 물 위로 나오는 바다표범을 사냥하곤 하는데 빙하가 녹으면서 얼음 두께가 얇아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썰매 개의 개체수가 지난 5년간 6500마리에서 2000마리로 감소한 게 단적인 예입니다.


온난화가 이누이트들의 삶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닙니다. 기후변화 때문인지 인근 해역에 볼락·대구·붉은메기 같은 새로운 어종이 나타나고 그린란드 넙치 개체수도 늘어나면서 어획량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해빙으로 지금까지 접근하지 못했던 지역에도 갈 수 있게 되면서 관광산업 활성화도 기대할 수 있게 됐고요.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는 환경 파괴를 최소화하면서 지속가능한 발전 방안을 찾는 것입니다. 이누이트 사이에서도 “언제까지 개썰매를 타고 바다표범을 잡으며 살 것이냐”는 의견과 “전통 문화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빙하·오로라 투어 등 생태 관광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좋은 대안이 될 것입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그린란드 앞바다는 작살에 맞은 고래가 흘리는 피로 온통 붉은 색이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여름철이 되면 밤낮없이 배나 비행기를 타고 나가는 고래 투어에 관광객들이 몰립니다. 고래에게도, 관광객에게도, 이누이트에게도 좋은 일이지요.


그린란드 루비광산 올 하반기부터 채굴 지난달 그린란드 수도 누크에서 열린 북극서클포럼의 주제 역시 경제 문제였다. 17개국에서 350여 명의 전문가가 참석해 나흘간 진행된 포럼에서 란디 이발드센 그린란드 파이낸스·광물 장관은 “기후변화로 일부 동토가 녹으면서 서부 해안지역의 루비광산에서 올 하반기부터 채굴을 시작하고 내년부터는 희토류 광산도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린란드에는 우라늄 26만t, 희토류 1000만t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극조약(61년 비준)으로 평화의 땅이 된 남극과 달리 북극은 아직 범지구적인 합의가 없다. 북극과 접한 북극이사회의 8개 회원국(러시아·미국·캐나다·덴마크·아이슬란드·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을 중심으로 개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옵서버 자격을 얻은 한국을 비롯해 중국·일본 등도 인프라 투자와 북극 항로 개척에 참여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일본은 그린란드 주요 자원 탐사 사업에 지분 참여하고 있으며, 러시아와도 북극해 항로 개설 협의를 통해 내년부터 상선을 운항할 예정이다. 중국은 시진핑 주석이 해양강국 건설을 천명하며 2013년 상하이에 북극연구센터 설립, 쇄빙선 추가 도입 등 일대일로 전략의 일부로 북극권 개발 참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12년 그린란드를 방문, 자원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지만 이후 구체적인 협력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김찬우 외교부 초대 북극협력 대표는 “빙하가 녹는 속도를 감안하면 2030년 이후 아시아~유럽 해상 물동량의 4분의 1을 북극 항로가 담당할 전망”이라며 “4500억 달러 규모의 환북극 경제권이 생기면서 인프라 건설 분야에만 1조 달러의 시장이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린란드뿐 아니라 노르웨이·아이슬란드 등은 한국과의 교류 확대에 호의적이다. 미국·러시아 등과의 주도권 다툼이 쉽지 않은 데다 중국을 파트너로 삼기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비투스 쿠아오키속 그린란드 산업통상외교 장관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 그린란드의 선망의 대상인 만큼 교류가 더 활성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환북극경제권 참여를 위한 한국 기업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러시아 야말 가스전에 투입될 세계 최초의 상업용 쇄빙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1호를 올 1월 진수한데 이어 총 15척을 만들어 공급할 계획이다. 이 선박에 쓰이는 저온용 후판은 현대제철이 개발해 공급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의 미래전략연구본부장인 김종덕 박사는 “극지방에서 배를 운항하려면 아이스 클래스 선박 개발, 운항 기술 습득, 단열 컨테이너 개발 등이 필수”라며 “기회가 오더라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놓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해 중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루리사트·카시아수크(그린란드)=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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