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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함락 100일] 3. 정당 우후죽순…극도의 정치 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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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현재 이라크의 정치상황은 해방 직후 한국과 비슷하다. 외국 군대의 주둔, 날이 새면 우후죽순처럼 새로 생겨나는 각종 정당과 정치 모임들, 이들이 연일 벌이는 정치집회, 서로 간의 반목과 투쟁….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동상이 무너지던 순간이 전 세계에 TV로 생중계됐던 바그다드의 피루두스 광장은 이제 '해방광장'으로 불린다.

지금 이곳에선 거의 매일같이 각 정치세력이 집회를 열고 목청껏 구호를 외친다. 바그다드 함락 직후, 종교적.민족적 정당을 중심으로 새로 조직된 10여개의 정치단체가 조촐하게 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석달이 지난 지금은 수십개에 이르는 정당과 정치모임이 등장했다. 바그다드 중심지는 하루종일 정치집회로 시끄럽다. 정치적 자유를 얻은 이라크인들이 민족.종파별로 분열되고 있다. 이라크의 정치는 극도의 혼란이라는 말 이외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시아파가 많이 사는 이라크 남부의 바스라. 도시 입구와 각 관공서 정문에는 이전에 걸려 있던 후세인의 사진 대신 시아파의 정신적 지주인 무하마드 사디크 알사드르의 사진이 걸려 있다. 후세인 정권이 살해한 인물이다. 버스의 앞유리나 식당의 벽에도 그의 사진이 붙어 있다. 이곳은 시아파의 땅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쿠르드족 거주지역인 이라크 북부의 모술. 보이는 건물의 벽이란 벽에는 한결같이 '반(反)후세인'과 '연방제 추진' 등 이곳의 지배정당인 쿠르드애국동맹과 쿠르드민주당의 정치 구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적혀 있다.

모술의 남동쪽에 있는 키르쿠크. 소수민족인 투르크멘족이 거주하는 곳이다. 이 도시의 하늘과 건물에는 파란 물결이 넘실거린다. 투르크멘 민족을 상징하는 푸른색 바탕의 깃발들이다. 이라크 국기보다는 적.백.녹 삼색 줄무늬 바탕에 태양이 중심에 자리잡은 투르크멘 깃발이 더 많이 보인다.

주요 수니파 도시인 팔루자와 티크리트는 차분한 분위기다, 후세인 대통령의 표밭이던 이 지역에서는 패전과 정권 몰락의 상처를 아직 치료하고 있는 중이다.

다양한 종파와 민족이 거주하는 바그다드에는 서로 간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남부 시아파들이 이주해 사는 사담시티에는 집안.이슬람사원.음식점 등에 시아파 지도자인 알사드르와 알하킴의 사진이 즐비하다.

그러나 그외 지역에서는 광장을 제외하고는 종파나 민족적인 정치 구호와 상징물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나마 이라크가 한 나라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민감한 정치개혁=정치개혁 문제는 상당히 민감하다. 군정 임시행정처(CPA) 자문관과 담당자들은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어렵게 만난 정치개혁분과위의 한 위원은 익명을 요구하며 "지금까지 정치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라크 통치위원회가 발족하고 제헌의회가 구성돼야 본격적인 전후 이라크 정치체제가 윤곽을 드러낸다. 제헌모임에서 제안하는 헌법.정부형태.선거법은 국민투표를 거칠 것이고 그 결과에 따라 자유선거를 통해 이라크 과도정부가 출범하게 된다.

그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과도정부의 출범과 동시에 임시행정처의 임무는 끝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향후 정치체제에 대해 그는 조심스럽게 "남부와 북부의 지방자치를 확실히 보장하는 대통령제로 갈 확률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상당수 이라크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현재의 정치개혁이 자신들이 아닌 점령군에 의해 좌우된다고 여긴다. 이라크인인 AFP통신의 카말 타하(31)기자는 "미군이 과도통치위원들을 마음대로 임명한 것으로 봐서 이라크인의 뜻을 반영한 진정한 정치개혁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통치위원회가 제헌의회 의원들을 임명할 독자적 권한이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며 "정치개혁의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폴 브레머 행정처장은 기자회견에서 "통치위원회 위원들은 미국.영국이 이라크의 정당들과 장기적이고도 광범위한 협의를 거친 후 결정했다"며 "이제 행정처는 자문역할에 더욱 치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대부분 이라크인들은 이 말을 믿지 않는다.

이라크 민족지식인전선의 이스마일 알둘라이미(59)사무총장은 "'통치위원회가 자문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말을 브레머 행정처장이 거꾸로 말한 게 아니냐"고 꼬집었다. 그는 "결국 제헌의회도 미국이 원하는 사람들로 구성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잘 모르겠는데요"='누가 차기 이라크 지도자가 될 것인가'와 '이라크인들은 어떤 정치체제를 원하나'를 알아보기 위해 이라크 전역을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 대답은 현재 이라크 정치의 혼란상을 그대로 반영했다.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 선호하는 지도자나 정부 형태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더 두고 보겠다는 것인지, 무관심한 것인지 혼란스럽다.

바그다드의 한 카페에서 만난 노인은 "60년이 넘도록 살면서 누가 지도자가 되건 내 생활이 바뀐 적은 없었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반면 종파적.민족적인 대립 양상은 뚜렷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부의 시아파들은 이슬람 지도자와 이슬람 정부를 선호했다. 북부의 쿠르드족과 투르크멘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자와 향후 독립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연방제를 선호했다.

전국적으로는 대통령제를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양한 민족과 종파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미 국방부에서 추천한 아흐마드 찰라비 이라크 국민회의 의장이 한표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사기꾼''도둑놈'이라는 욕만 얻어먹었다.

그는 이제 이라크의 '지는 별'이 됐다. 대신 "아드난 파차치를 주목하라"고 말한 요르단 중동문제연구소 소장 자와드 알하마드의 말이 맞아떨어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서정민 중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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