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332) 제83화 장경근일기(13)<본지독점게재>|미결수번호 「300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60년5윌20일
오탁근검사의 전화연락을 받고 서울형무소에 나가 심문을 받았다. 심문은 네가지에 초점을 맞췄다. ①공무원 선거운동비용 지출 ②자유당 완장부대 동원 ③민주당의 한강 백사장 사용금지 ④개표의 삭감 발표 등이 자유당 기획위원회 결의사항이라는 점이다.
공무원 선거운동비는 한희석위원장과 박용익총무위원장이 반도호텔에서 최인규내무, 이강학치안국장, 최병환지방국장에게 전달했다는 것이지만 이런 지출은 비밀사항으로 기획위원회 승인사항은 아니다. 완장부대 동원도 내무부가 한 일이고 기획위원회는 계획 취소를 요청했었다. 민주당이 선거연설 장소로 한강 백사장을 신청했을때 최내무는 기획위원회에 나와 주위에 담장이 없어 연설후 데모가 일어나면 막기가 어렵다고 해 기획위는 대신 서울운동장을 사용하도록 조치하라고 했으니 죄될리 없다. 개표도중 자유당 후보의 득표를 삭감해 발표하라고 기획위원회가 결정한 것은 분명한 불법이다.
지난번 김병만검사는 최내무의 선거부정계획을 기획위원회도 도왔다는 방향으로 심문을 했는데 오검사의 심문이 달라진걸 보면 기획위가 최내무의 부정선거계획을 취소하도록 요구한 사실을 인정한 모양이다. 심문도중 오검사는 1시간쯤 자리를 비웠다. 왜인지 몰랐는데 돌아오는 길에 그 연유를 알았다.
오검사는 그 시간 형무소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운전사 오세환군을 불러 개표날 저녁 내가 일찍 집에 돌아갔는지를 확인하는 심문을 했다는 얘기다. 집에 돌아오니 내가 구속될까봐 침울해 있던 가족들이 뛸듯이 반긴다.
◇60년5윌23일
오검사가 형무소로 나와 달라고 한다. 서울형무소 2층 조사실에 나가 기다렸더니 박만원·유각경씨도 나왔다.
오검사는 저녁 무렵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검찰청 수사과 직원2명이 우리를 지키고 있다. 기어이 구속이구나하고 느끼면서도 구속 사유가 될 것이 없다. 점심·저녁을 셋이서 시켜다 먹고 신문을 가져달라고해 보니 우리 셋은 서울형무소에 구금중이고 오늘중 구속영장이 발부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저녁9시쯤 나타난 오검사는 전번의 4개항에 대한 심문을 다시 하더니 저녁9시 구속영장을 집행한다.
감방으로 오다 보니 박·유 두분은 계속 대기상태다. 나는 오검사에게 유여사는 70고령인데다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그녀에 대한 구속방침을 항의했지만 소용없는 노릇이다.
구치감 5사상13호에 수용된 미결수 번호 3000번이 이제 나의 이름이다. 감방은 폭 5척5촌, 길이 8척, 변기가 둘 있다. 보통 5인용인데 지금은 나 혼자다. 빈대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
◇60년5월26일
오늘 기획위원들이 모두 수감되었다. 병중인 이존화조직위원장을 제외한 12명이다. 국무위원·내무부 간부·은행 관계자에다 장면부통령 저격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이익여전내무, 반공청년단장 신도환 등의 구속에 이어 자유당 간부 전원을 구속했다. 마치 자유당과 이승만정부의 요인들이 모두 서울형무소로 이사온 느낌이다.
개인마다의 행위를 따지는게 아니고 지위를 벌한다. 정치적 책임과 형사책임을 구분해 소추해줄 것을 바랐던 나의 생각은 너무 안이했다. 하긴 어느 나라나 정변은 구질서에 대한 강한 반동이 나타나는 법인데 민주정치의 경험이 낮은 우리 형편에서 냉정한 판단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신문들도 검찰의 구속확대엔 박수를 보내고 죄의 유무를 따져 주저하는 빛이 보이면 비판하는 논조를 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