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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조선통신사의 길을 가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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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82년 6월 나고야(명고옥)의 고오쇼오(흥정)사에서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그린 두루마리 그림이 발견됐다.
폭 27㎝, 길이 8.55m의 대작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신문들이 흥분했다. 아사히(조일)신문은 「조선사절단의 그림, 명고옥에도 현존」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을 곁들여 크게 보도했다. 쥬우니찌(중일)신문, 마이니찌(매일)신문도 「조선통신사의 행렬도 2백년의 잠에서 깨어나다」, 「민화풍의 조선통신사 도중 그림」 등의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한때 조선통신사가 왕래한 흔적마저 없애거나 멀쩡하게 조공사로 날조해온 일본인들이 통신사 행렬도 발견에 이처럼 소동을 부렸다는 것은 일본사회에 일기 시작한 대한인식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 볼수 있다.
그림을 발견한 나고야의 동방고등학교 역사교사 「누구이·마사유끼」(관정정지)씨는 이 행렬도가 발견되고 나서 나고야 시민들의 통신사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져 역사를 돌이켜 보는 각종 행사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림이 발견된 해인 82년 11월에는 「역사의 여행, 조선통신사의 길을 가다」란 이름으로 견학단이 조직되어 교오또(경도)의 센요(천용)사, 오오미(근강)의 조선인가도, 호오슈우(방주)서원 등을 돌았다. 참가자는 학생·회사원·OL·주부·교원 등 1백명이 넘는 성황이었다.

<반일감정 거센 1세 행사참가 거부반응>
83년에는 멀리 대마도방문단이 조직되어 4일간 대마도의 조선통신사 유적들을 찾아 다녔다. 30명의 정원을 훨씬 넘는 희망자가 몰려들어 이 행사를 주관한 「누구이」씨의 애를 먹였다.
매년 10월에 열리는 나고야 마쓰리(제·종교적행사를 겸한 축제)에는 83년부터 재일 한국청년들이 주관하는 통신사 행렬이 추가되어 갈채를 받고있다.
취재팀이 나고야에 머무는 동안 이 행사를 이끌고 있는 동포청년들이 찾아와 밤늦게까지 소주를 기울이며 얘기를 나눈 것은 이번 취재여행에서 겪은 감동적인 일 중의 하나였다.
처음 행사를 추진했던 변천석(40·전 명고옥 청년경제회회장)씨는 자신의 선조가 「무로마찌」(실정)시대 조선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고 통신사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며 우리가 일본을 가르쳤던 옛날의 한일관계사를 알게됨으로써 자신이 한국인이라는데 긍지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자리를 함께한 다른 청년들도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가하면서 역사에 관심을 갖게됐고 일본사회에서 받고있는 편견과 차별의 눈길을 관용과 아량으로 이겨낼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다만 나고야의 마쓰리가 이 지방에서 몸을 일으킨 「오다·노부나가」(직전신장), 「도요또미·히데요시」(풍신수길), 「도구가와·이에야스」(덕천가강)의 행렬을 중심으로 거행되기 때문에 반일감정이 강한 1세동포들 중에는 이 행사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반대하는 사람중에는 통신사 행렬이 「도요또미·히데요시」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용서할수 없다며 투석 등 테러의 위협까지 하는 바람에 사복형사가 특별 배치될 정도라는 얘기였다.
임진왜란과 에도의 교린시대가 교차되는 근세 한일관계사는 지금의 동포사회에까지 이어져 갈등을 빚고 있었다.
나고야에 통신사 바람을 일으켜 놓은 「누구이」씨는 일본내의 한국역사 연구단체인 「조선사연구회」 회원으로 한일관계사 연구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다. 나고야에 따로 「명고옥조선사연구회」를 만들어 지도하고 있었다. 12명의 회원중에는 사업가·주부·학생들이 골고루 들어있다고 했다.
이번 나고야 취재에서는 「누구이」씨 뿐아니라 이 연구회 회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고야 주변의 통신사 유적지인 오꼬시(기)숙, 주교(양교)터 등을 찾을 때는 「누구이」씨의 부인 「미도꼬」(미도자)여사와 사업가인 「스즈끼」(영목의웅)씨가 자기 차로 일일이 안내해 주었다.
「스즈끼」씨는 취재팀이 나고야를 떠나 다음 행선지인 도요하시(풍교)시, 하마마쓰(빈송)호반의 아라이세끼쇼(신거관소) 유적지를 찾을 때도 회사일을 제쳐 놓고 차편까지 제공하며 동행하는 열의를 보였다.

<인정미 넘치는 그림 작자·연대 알수없어>
우시마도(우창)의 가라꼬춤(당자무)을 규명한 오까야마(강산)의 「니시까와」(서천굉)씨, 오오가끼(대원)의 죠센야마(조선축)를 추적한 「야마다」(산전미춘)씨를 만났을 때도 느낀 일이지만 「누구이」씨와 같은 지방역사가의 존재가 올바른 한일관계사정립에 얼마나 귀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할수 있었다.
「누구이」씨의 주선으로 고오쇼오사의 통신사 행렬도를 직접 가서 볼수 있었다.
고오쇼오사에서는 이 그림이 크게 소개된후 그림을 보자는 사람이 많아지자 훼손을 우려, 일반 공개를 하지않고 있었다.
그림에는 조선통신사 일행 1백30명, 호위하는 왜인 1백여명이 등장하는데 한사람 한사람의 표정까지 세일하게 그려져 있었다. 필치가 유려했다. 고개를 넘고 바닷가를 지나가는 장면 등 이제까지 발견된 다른 통신사 행렬도에서는 볼수 없는 변화있는 그림이었다.
통신사의 수행원과 호행 왜인이 얘기를 나누는 장면, 서로 부르고 대답하는 장면, 담뱃대를 주고받는 장면 등은 양국 국민사이에 오가는 따뜻한 인정미를 물씬 풍겼다. 한일친선의 분위기가 넘치는 그림이었다.
미완성 작품인듯 행렬의 앞부분만 색채가 칠해져 있고 뒷부분은 흑백이었다.
그림에는 「한사내빙도」라는 표제만 씌어있을뿐 작자 연대는 알수 없었다. 다만 그림과 함께 보관돼 있던 전적중에 「한객일행좌목·관성명」이라는 1764년 통신사때의 기록이 발견되어 그림도 이때의 통신사 일행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고야에는 조선의 귀한 문헌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기로 유명한 호오사(봉좌)문고가 있다. 먼길을 온 김에 동구덕천정 오와리 도꾸가와(옥장덕천)가의 옛저택부지에 자리잡고 있는 호오사문고를 찾았다. 통신사에 관한 자료도 많이 보관하고 있었다.

<고려사절요 35권은 일, 중요문화재 지정>
호오사문고의 기본이 된 조선문헌은 「도요또미·히데요시」가 임진왜란때 약탈해간 방대한 문헌의 일부다.
「도요또미」정권을 무너뜨리고 막부를 개설한 「도꾸가와·이에야스」는 「도요또미」계의 영지, 재산을 몰수하면서 약탈해간 조선문헌들도 수중에 넣었다.
「이에야스」는 그중의 일부를 교오또의 엔꼬오(원광)사 학교와 「아시까가」(족리)학교, 에도의 후시미떼이(부사견정)문고에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만년에 은거한 슌뿌(준부·지금의정강)성에 옮겨 스루가(준하)문고를 만들었다.
엔꾜오사에 기증했던 조선본은 후에 국회도서관에 기증됐고 후시미떼이문고는 궁내청 서릉부(서능부)와 내각문고에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에야스」가 직접 가지고 있던 스루가문고는 그의 유언에 따라 2대장군 「히데다다」(수충) 집권시에 일부만 장군가에 남기고 나머지는 고산께(어삼가)로 불리는 미도(수호) 기이(기이) 오와리(옥장) 3가문에 분배되었다. 그중 미도와 기이의 문헌은 산일되고 오와리번의 문헌만이 지금까지 호오사문고에 보관돼 오고 있다.
호오사문고의 조선본은 1천3백91권이다. 그중에는 단 하나뿐인 고려사절요 초간본, 악학궤범, 그리고 가장 오래된 고활자본인 삼국유사 등이 들어 있다. 고려사절요 35권은 일본에서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직원들은 한국에서 온 취재팀에 친절했다. 통신사 일행이 숙사인 쇼오고오인(성고원)에서 시문을 주고 받는 「옥장명소도회」, 주교의 설계도, 통신사를 접대할 때의 메뉴견본을 그린 화첩 등을 보고 사진도 찍을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문고에서 잠자고 있는 우리의 귀중한 문헌들을 생각하니 착잡한 감회를 지울수 없었다. <글 신성순 특파원 사진 김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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