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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학생칼럼

감정노동자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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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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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서윤
중앙대학교 지식경영과 1학년

낮엔 은행 텔러로 일하고 밤엔 학교에 다닌다. 2년 반 전 나는 구청지점 세금 수납창구에 혼자 근무하고 있었다. 월말이고 세금 납부 마감일이어서 유난히 바빴다. 업무에 파묻혀 있는데 고객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ATM기에서 출금을 했는데 돈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창구 앞에 열 명 넘게 고객이 기다리고 있어 잠깐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고객은 다짜고짜 “확인은 나중에 하고 일단 네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업무를 중단하고 기계를 점검해 돈을 건넸다. 그런데 그가 짜증난다며 내 얼굴에 돈을 뿌렸다. 그 순간 느꼈던 모멸감과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민원이 두려웠다. 고객에게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출근한 순간부터 나는 20대 초반의 여성이 아닌 ‘감정노동자’가 된다. 고객의 무리한 요구에도 최선을 다해 응대하지만 어떤 고객들은 민원을 제기한다. 그 민원이 은행 직원에게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민원 한 건당 신용카드 100좌’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인사기록에 남고, 실적에 영향을 미친다. 직원 잘못이 없어도 민원이 제기됐다는 사실 자체로 불이익을 받는다. 그러니 금품이나 대가를 노리고 민원을 넣는 악성 고객에게도 행원은 무조건 죄송하다고 하고 이를 취하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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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얼마 전 6대 은행의 민원이 1년 전 622건에서 599건으로 약간 줄었다는 기사를 봤다. 기쁘기는커녕 착잡했다. 민원 건수를 줄이기 위해 창구 직원들이 겪었을 고통과 굴욕이 남의 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원도 민원 나름이다. 합당한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절하는 게 상식이고 정도다. 하지만 회사는 타당한 민원이고 제대로 처리됐는지를 따지지 않는다. 민원 숫자를 줄이는 데 급급해 직원에게 고객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강요한다.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고객과 민원 건수만 중요시하는 금융사 사이에서 우리 같은 감정노동자들은 지쳐 간다.

회사에도 좋을 게 없다. 이런 방침은 고객의 갑질을 부추길 뿐이다. 사소한 것도 민원으로 들어오게 되고, 민원을 처리하다가 중요한 고객을 놓치기도 한다. 민원을 제기하는 고객보다 무조건 수용하라는 회사의 태도가 더 큰 문제다. 고객 만족과 회사 발전을 위해 민원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허서윤 중앙대학교 지식경영과 1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