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모교에 가봐야디?|「평양 제일고」동창들 긴급 동창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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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야, 희도 들었디, 이게 꿈이가 생시가.』
『기래, 정말 가긴 가갔나, 아무래도 믿기디가 않는다야』
『무슨 소리가, 가야디. 반드시 가야디, 가서 부모형뎨도 만나보고 고향산천도 다시 보고, 그리고 우리 모교도 찾아봐야디.』
『기래 맞다. 자, 우리 모교를 위해 건배. 평양시 상수리 모단봉중턱, 피양 제일의 명당, 피양 제일의 명문, 평양 제일고….』
마침내 웃으며 부딪친 감격의 술잔. 60을 바라보는 반백의 사내들이 붉어진 눈시울을 마주하며 술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분단 40년 만에 굳은 담벽에 작은 구멍을 뚫은 남북고향방문단 교환소식이 온 국민을 설레게 한 22일. 평양의 명문 평일고 동창들이 약속도 없이 한자리에 모였다.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듣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화통을 붙들었다가 고향냄새가 그리울 때면 모이곤 하던 서울 중곡동 평양냉면 집에서 예정에 없던 동창회를 갖게된 것이다.
동창회 전 회장 한관수씨(57·율림건설회장·서울 자양동260의27).
현 동창회 총무 김만영(55·체신부 중앙전파감시소 회계담당계장), 이원근(57·의류제조업), 윤재유(55·동남공업사대표), 박희도(54·침구제조업)씨 등 5명. 71년 설립된 동창회는 해방 후 평양 제일고 1∼5회 졸업생만으로 6백78명의 회원이 파악돼있다.
그 전시인 해방전의 평양고보까지 포함하면 2천여명의 인재들이 실향의 설움을 안고 각계에서「피양내기」의 실력을 보이고 있다.
『비록 다섯명이 모였지만 다른 동창들도 모두가 한마음 일 겁니다. 이것이 첫걸음이 되어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돼야지요. 우리 동창들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동창회 창립에 주동역할을 한 전 회장 한씨의 말.
술잔이 오가며 화제는 어느새 40년 세월을 거슬렀다.『야, 너희들 검동다리 생각나니?』
『기럼. 교문 앞의 그 다리에서 내려다보던 5리 밖 대동강 물줄기가 눈에 선하다야』
『아니라. 대동강 바라보던 다리가 아니라 평양 제일고 여학생들을 만나던 다리 아니가!』
평양의 유일한 공립남고 평일고는 평양의 수재학교. 서울운동장 만한 운동장에 대형강당과 음악당, 도서관까지 아쉬움 없던 시설을 동창들은 눈에 그리듯 회상했다.
그러나 47년9월 김일성정권이 들어서 학제개편과 함께 평일고가된 학교는 일방적인 공산이데올로기수업, 러시아말교육, 교회출석금지, 학생상호감시, 자아비판의 속박으로 이들의 학창시절을 옭아매 들어왔다.『참 어려웠디. 그 무렵에 월남한 친구들도 많았고 졸업 후 6· 25, 1·4후퇴 때 절반이상이 남으로 오고 말았디.』
평일고동창회의 현 회장은 김동선 전 외대총장. 동창중엔 유기천 평남지사, 강인덕 극동문제연구소장, 법의학계 권위인 문국진 박사를 비롯, 박사만도 50여명, 대학교수가 20여명이며 나머지 대부분 동창도 사업 등으로 기반을 닦은 처지. 80%쯤은 또 기독교신자다.
동창회는 그동안 모은 기금이 1억원을 넘어서 이 돈으로 동창들이 함께 묻힐 산을 사들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이번 방문단엔 우리동창회에서도 몇 명을 뽑아 보내자. 거 이원근이는 이미 신청을 했고 그밖에도 몇몇 있디않니. 먼저 가겠다는 친구들부터 보내야돼.』
이들이 1년 중 가장 싫어하는 명절이 추석(추석). 『가서 절할 곳이 없어 동창가족끼리 한데 모이지만 그 모임의 파장은 꼭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며 이제 평양길이 뚫렸으니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서로 다짐이다.
『아주마니요. 여기 술 좀 더주시라우요.』
깊어가는 여름밤 반백의 동심은 시간을 잊는다.

<고도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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