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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조선통신사의 길을가다|일본민중속에 살아숨쉬는 조선산<죠센야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오오가끼에서는 민중레벨의 문화교류도 활발했다.
오오가끼시 다께시마 (죽도) 정에 전해져 내려온 「죠센야마」(조선산) 는 우시마도 (우창) 의 가라꾜춤 (당자무) 과 함께 통신사를 통해 일본 민중속에 뿌리내린 조선문화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야마」 (산혹은 산거) 란 말은 풍속이 다른 우리에게는 생소한것이다.
일본에는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전국의 어디에서나 마을 혹은 거리, 신사를 중심으로 서민들이 참가하는 제전을 벌이는것이 전통적인 습관으로 돼있다.
이를 마쓰리(제)라 부른다.
마쓰리는 농사와 상업의 번영을 빌고 지역 주민들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는 제전인 동시에 봉건적인 억압속에 살아야했던 일반 민중들이 잠시나마 해방된 분위기에서 마음껏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써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할수있는 축제의 의미도 갖고있는 행사다.
봉건영주를 대신한 회사조직속에서 개미처럼 일하는 현대의 일본인들이 마쓰리의 전통을 소중히 지켜나가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마쓰리는 신위를 모신 가마나수레를 메고 끌며 행렬을 지어 거리를 누빈다. 이가마나 수레는 「야마」라 불린다.
죠센야마는 오오가끼의 다께시마정에서 매년 마쓰리때 사용한 조선식으로 꾸며진 「야마」다.

<4신수 수놓은 옷등 밀봉된 상자에 44점>
오오가끼의 향토사가 「야마다·미하루」(산전미춘·43)씨에 따르면 오오가끼에서는 1648년이래 매년 4월 성하의 10개정이 참가하는 마쓰리를 벌여왔다. 이때 각 정에서는 각기 특징있는 야마를 끌고 나오는데 부유한 죠오닌 마찌 (정인의 거리)로 알려진 다께시마정에서는 죠센 야마를 자랑스럽게 내 놓았으며 죠센야마를 중심으로 통신사의 행렬을 재현했다는 것이다.
오오가끼시가 펴낸 『대원마쓰리』란 책자에는 죠센야마가 이렇게 소개돼 있다. 『조선산는 별명이 조선왕산, 조선인산, 당인행렬등으로 불린것으로 4륜의 야마에 조선국사를 모방한 대장인형을 앉혔으며, 완전히 갖춘 조선복을 입은 행렬의 선두에는 청도라고 쓴 깃발이 앞서가고 그뒤를 피리, 북, 호궁등을 든 긴 행렬이 따랐다』
또 죠센야마보존회가 간행한『대원마쓰리·야마와죽도정』이란 책자는 죠센야마의 유래를 이렁게 설명하고 있다.
『죽도정의 주민 (하합성 대흑옥치병위의 선조)이 대원를 통행 하는 통신사 일행을 따라가게 됐을때 용장 (용장) 한 가운데 기풍이 있는 아름다운 행렬에 감명을 받고 그 의상이나 장식등을 기억해 가지고 돌아와서 이를 모방하여 만든것이 조선산다』
오오가끼의 마쓰리는 응신천황을 제신(제신)으로 하는 하찌만(팔번)신사의 신도행사의 하나였다.
죠센야마는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일본의 전통적 신도의식에 조선의 색채를 가미하려한 시도였다고 할수있다.
또 그 시도가 민중의 손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다는점에서 통신사가 일본에 끼친 영향의 크기와 당시 일본인들의 조선 문화에 대한 동경을 읽을 수있다.
기록에 의하면 죠센야마는 명치초기까지 오오가끼마쓰리의 주역으로 활약해 왔다.
수레도 처음에는 가마와 같은 형태에서 1751년부터는 3륜으로된 아름다운 궁전수레모양으로, 그리고 1808년부터는 다시 개조하여 4륜의 호화현란한 죠센야마가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명치정부의 이른바 신불분리정책에 의해 신도행사에서 불교적인 색채나 신도와 관계없는 요소는 모두 제거되게 됐으며 다께시마정의 자랑이었던 죠센야마도 폐지됐다.
지금 다께시마정에서 쓰고있는 야마는 죠센야마가 폐지되고 명치2∼3년 (1869∼70)에 새로 만든 것이다.
군국주의가 판을 치던 시기에는 죠센야마에 대한 얘기조차 이곳에서는 터부였다. 새로 만든 야마의 4기둥에 새겨진 용, 기린, 봉황, 거북의 조각과 야마의정면에 내거는 「왕인, 아직기상」자수그림만이 이 거리가 한반도와 밀접한 연계를 갖고 있음을 암시해줄 정도였다. 죠센야마나당시의 행사에 쓰였던 물건들은 완전히 멸실된듯 했다.
그런데 76년11월21일 NHK방송이 「이조의 기념물」이란 제목으로 죠센야마의 유품들을 공개하고 그내력을 소개, 일본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다.
77년에는 오오가끼성에서 유품전시회가 열리고 78년에는 현문화재로 지정됐다.
향토사가 「야마다」씨에 따르면 죠센야마 유품이 처음 발견된 것은 64년이었다.
다께시마정 주민들이 야마를 보관하는 창고를 손질하다 창고 천장에 감추어진 가로4m, 세로3m, 높이50cm 크기의 밀봉된 나무상자를 발견했다는것.
상자 안에서는 장군의 머리인형, 조선왕이라쓴 기치, 조선특유의 구름무늬가 수놓인 대장 의상, 용·호·기린·주작등 4신수와 문방4보를 수놓은 겉옷 등 44점이 들어 있었다.

<소아병적 의식 팽배 위험 무릅쓰고 감춰>
당시 시청에 근무하던「야마다」씨는 마을사람들의 요청으로 상자속에서 나온 물건들을 조사하는 일을 맡았다.
이것이 죠센야마의 유품이라는 것을 확인하는데도 문헌의 조사등 시간이 걸렸지만 사실을 공표하는데는 더 큰 어려움이 따랐다.
마을사람들중에는 이런 유품이나왔다는 사실 자체를 덮어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것은 무조건 감추어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소아병적 의식이 발동한 것이다. 명치이래의 오랜 군국주의교육이 가져온 경과였다.
대대로 이곳에 살고있다는 죠센야마 보존회 회장 「구리따」(율전청치·76)씨는 어렸을때 죠센야마 얘기를 어른들로 부터 들었으나 창고의 관리가 엄격해 어린이들은 접근도 할수 없었으며그 유품이 감추어져 있으리라는 생각도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죠센야마를 소중하게 여긴 당시의 마을사람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유품들을 감추어 보존하려했던 것이다.
조선의 문화를 흠모하던 에도시대의 일본인들과 군국주의 1백년의 역사를 거친 지금의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대한인식의 차이를 여기서도 읽을수 있다. 다께시마정40번지 죽도회관에있는 죠센야마보존회를 찾았다.
회관은 전에 봉건영주들을 위한 여관(본진)으로 쓰이던 건물이다. 부인회등이 들어 있었다.
입구에 「현·시중요유형민속문화재죽도정보존회」란 간판이 걸려있다.
보존회장 「구리따」씨와 마을자치회장 「고시마」(오도무웅·63)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보존회는 건물입구 오른쪽의15평정도되는 다따미방을 쓰고 있었다.

<전재·홍수에 불구 소중히 보관 힘써>
죠센야마에 쓰였던 장식물들과 의상이 방안 가득히 진열돼 있고 당시의 행렬을 그린 액자가걸려있다. 통신사 행렬도와 다름이 없다.
각종 의상들은 펼쳐진 모양으로 유리진열장안에 소중히 보관돼 있었다. 푸른바탕에 금색으로 수놓은 무늬와 그림들이 아름답고 정교하다. 한눈에 고급천임을알 수 있었다. 에도시대 일본의상류계급에서나 입을수 있었던 니시진오리 (서진직) 라 했다. 교오또 (경도) 에 특별주문하지 않으면 손에 넣을수 없는 물건이었다.
다께시마정은 오오가끼에서도 부유한 상인의 거리였다고 하지만 죠센야마에 얼마나 정성과 돈을들였는가 알수 있다.
1백년간 창고천장에 들어 있었는데도 크게 손상되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야마를 보관할 창고는 3층높이의 흙벽건물인데 미군폭격때도 이곳만은 피해를 보지 않았고 몇차례의 홍수에도 높은 천장은 안전했다는 얘기다.
처음에 공개를 꺼려했던 사람들도 지금은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생각하고 화재의 위험이 있는 지금의 건물보다 안전한 보관장소를 물색하고 있다고 「고시마」씨가 밝혔다.
이교수는 조선민화를 소재로한 그림과 무늬로보아 다께시마정에분산 투숙했던 통신사 일행의 하급종사자가 그려주었을 가능성이 높은것으로 보았다.
유품들을 대하니 한반도문화를 깎아내리던 명치의 강한 탄압속에서도 일본의 민중들이 이를 보존해 왔다는 사실이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조선의 통신사는 오오가끼의 다께시마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글 신성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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