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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소에 이주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크렘린 "극진한 대우|그가 살던 카작스탄엔「홍범도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소련으로 간 독립군사령관 홍범도장군의「그후」는 어떻게 됐을까. 고송무씨 (핀란드 헬싱키대강사)는 최근 이를 추적, 유럽교포신문인「구주신문」에 「소련에서 보는 홍범도」란 글을 게재했다.
그에 따르면 홍범도는 1943년에 사망했다. 더웁기로 이름난 중앙아시아 카작스탄의 크즐-오르다시에서였다. 지금도 이시의 한거리엔 그의 이름이 붙어있으며 홍범도의 무덤엔 붉은 별이 장식된 비석이 세워져있다고 한다. 이는「김·마트꿰이·치모페에위츠」가 쓴『원동에서 1918∼22년 소비에트주권을 위해 투쟁한 조선인 국제주의자들』이란 책속에 쓰여있다.
지금까지 국내에선 그의 사망연대·장소가 자료마다 달랐다. 『한국근대인을 백인선』엔 『…시베리아 차가운 눈보라속에서 눈을 감았다』는 기록도 보이고있다.
1920년 6윌 봉오동 전투와 10윌 청산리전투, 21년6윌 흑하사변을 겪은 홍범도는 연해주가 소비에트화된 뒤 레닌당의 당원이 되고 농산협동 조합장을 맡았다고 이 소련측 자료는 전하고 있다.
고씨는 아마도 그가 1937년까지 연해주에서 살다가 그해 가을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이주때 함께 그곳으로 옮겨 크즐-오르단시에서 연금을 받으며 살다가 생을 마친 것으로 보았다.
고씨는 홍범도가 한국과 소련에서 동시에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에선 지난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 받았으며 소련에서도「혁명가-국제주의자」로 높이 추앙받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이오시프· 김」이 쓴 『소련 한인극단』엔 홍범도의 말년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73세의 나이로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정규군에 자원했으나 거절당했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한인예술가 진창화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있다.
『거절을 당하자 홍범도는 그가 왜 동원에 포함되지 않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자신의 힘과 유연성을 증명하기 위해 사병들이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사격장에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25m 떨어진 거리에서 5코폐이카짜리 동전을 명중시켰다.』
홍범도는 가만히 있을수 없어 당시 크즐-오르단에서 활동하던 소련 한인극단을 찾아가 극단의 용품을 돌보는 일이라도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여기서 한인 희곡작가 태장춘은 홍범도를 만나 의병운동얘기를 듣고 그를 주제로한 희곡 『홍범도』를 창작키로 했다. 창작과정에서 홍범도는 태장춘에게 자신의 영웅적 행동보다 전우들에게 역점이 두어져야 하고 사실을 본래대로 묘사해주기를 주문 작가로 하여금 적지않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했다. 연극『홍범도』는 42, 47년에 소련 중앙아시아 한인극단에서 공연됐으며 후평 『빨치산들』은 57년에 공연됐다고 한다.
다시「김·마트웨이·치모페에위츠」의 글을 인용하면 홍범도는 1869년 (또는 l868년) 8월 평양근처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3년간 삼촌과 살다가 이어 머슴살이를 했다. 20살때 그는 평양 병사부에 복무했으나 3년뒤 굴욕적인 생활끝에 이곳에서 도망쳤다. 함경도에서 2년간 광산일을 한뒤 삼수출신 한 농부의딸과 결혼, 처가에 가 14년간 농사와 사냥을 했다. 이때 서서히 주민들로부터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홍범도는 체격이 컸고 거의 항상 두껍고 새까만 수염을 달고 다녀 넓은 얼굴모습을 해보였다.
그는 사냥꾼들을 조직, 우두머리가 됐다. 1907년 11월 일본 원정군이 사냥꾼의 무기와 탄약을 해체시키기 위해 갑산에 도착했을때 첫 충돌이 일어났다. 이것은 그후 홍범도에 의해 끈질기게 주도된 항일무장독립 의 시발이었다.
고씨는 금세기초 한국역사에서 정통성을 이어가야 할 한일 무장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를 다시 한번 촉구했다.
그는『홍범도에 대한 연구도 언젠가 한국과 소련학자들이 마주앉아 토론해 볼 과제』라고 말했다. 이자료는 이종찬 (국회의원) 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 씨에 의해 입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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