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재즈 디바의 탄생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80호 29면

말로 3집 ‘벚꽃 지다’

그녀를 만난 곳은 공항이었다. 비행기는 지연되고 있었고 공항 로비는 늘어나는 승객들의 원성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옆에 부산출신 연극배우 L씨가 서 있었다. 촬영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려다가 발이 묶인 것이다. 앉을 자리도 찾지 못하고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애꿎은 전광판을 한참 나무랐다. 젊은 여자가 배우 L씨에게 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것이 그 즈음이다.


“오랜만이에요, 선배님. 서울로 촬영가시나 봐요.” 그녀의 이름은 말로였다. 2001년 여름이었고 그녀는 당시 재즈클럽을 중심으로 조금씩 이름을 얻어가고 있던 가수였다. 비행기는 금방 뜰 것 같지 않았다. 우연히 만난 우리 셋은 공항 내 커피점으로 향했다. 화제의 중심은 아무래도 영화와 드라마 쪽으로 발을 넓혀가고 있는 배우 L씨에게 집중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허겁지겁 일어났다. “어, 내 비행기 왔나 봐. 나 먼저 가요” 하며 자리를 떴다. 선보러 나온 사람들처럼 초면의 남녀가 어색하게 남아있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라디오 진행자처럼 꼬리를 물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때로는 작업근성보다 직업근성이 위기를 넘기게 해준다.


말로는 부산이 고향이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음악이라는 공통 화제가 있어서 초반의 어색한 분위기는 이내 사라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어떤 책에서 방송국에 홍보하러 다니며 느꼈던 비애를 말한 적이 있다. 재즈를 이해하지 못하던 PD들이 이상한 음악 취급했다는 것이다. 신인 가수에게 방송국 문턱이 그리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말이 좀 통하는 만만한 동갑내기 PD를 만났으니 그녀 역시 이야기의 문을 닫지 않았다.


말로는 한국 재즈 저변이 취약하다는 이야기와 자신이 본 재즈 공연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해주었다. 나는 재즈에 대한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버클리대 우등생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 중에 내가 던진 돌직구 하나가 기억난다. “1집 앨범 표지는 진짜 아니던데요. 어디서 그런 사진을….” 순간 ‘아차’ 했으나 대인배답게 그녀 역시 표지가 좀 아쉬웠다고 답했다.


비행기 결항이 만들어준 한 시간의 인연은 공연장에서 한번 보자는 인사와 함께 끝이 났다. 몇 달이 지난 후 그녀는 짧은 메모와 함께 재즈 잡지의 비매품으로 들어있던 본인의 CD를 보내주었다. 나는 이후 말로의 공연장을 간 적이 있지만 애써 무대 뒤를 찾지는 않았다. 뭐라고 소개할지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 저 공항에서 만났던 사람입니다.” 좀 우습지 않은가?


내가 생각하는 말로의 최고 음반은 2003년에 나온 3집 ‘벚꽃 지다’다. 오래된 폐교의 복도 위에서 벚꽃을 밟고 있는 앨범 표지부터 1집과는 많이 달랐다. 블루스와 재즈, 가요를 절묘하게 엮었다. 아련한 전제덕의 하모니카 역시 신의 한 수였다. 1집과 달리 말로는 힘을 빼고 노래한다. 곡에 따라서 재즈 가수라는 정체성마저 대수롭지 않게 내려놓는다. ‘아이야 나도 한땐’이라는 노래에서 그녀는 아무런 장식이나 기교 없이 씩씩한 소녀처럼 노래한다. 반면 ‘저 바람은’ 후반부에서는 그녀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재즈 스캣이 작렬한다. 20대의 치열한 노래공부와 그것을 드러내고자 했던 시간이 지난 자리에서 진정한 재즈 아티스트 말로가 탄생한 것이다. 재즈 디바 말로의 분기점이 된 앨범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앨범은 지금은 음반제작자로 활동하는 이주엽이라는 음악적 동반자가 있어서 가능했다. 평단에서도 둘의 합작을 두고 ‘한국 재즈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이주엽은 말로가 지은 모든 노래에 처연한 가사를 입혔다. 그가 쓴 ‘푸른 5월’의 가사를 보자. ‘나를 깨우지 마, 나를 흔들지. 따뜻한 꿈처럼 나를 잊고 싶어. 잠시만 반짝이고 싶네 푸른 5월.’ 잘 써진 하이쿠를 연상시킨다.


이 앨범은 전체적 완성도가 좋지만 바쁘신 분들은 ‘벚꽃 지다’만 들어봐도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할 듯하다. 가사와 멜로디, 그리고 무대 모서리에 앉아 있을 듯한 말로의 가창이 인상적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아련함을 단 한곡의 음악으로 옮겨와야 한다면 바로 이 노래다. 이 앨범에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으로 시작하는 박시춘의 ‘봄날은 간다’가 수록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결국 공항에서 만난 우연한 인연이 십 여 년을 건너 이 글까지 이어졌다. 그러고 보면 인생 어느 골목에서 어떤 인연을 만나게 될지 모를 일이다. 벚꽃 진 지 오래고, 봄도 이제 가지만 어딘가에는 꽃이 피면 같이 울고 웃어 줄 인연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잘 가라, 봄. ●


글 엄상준 KNN방송 PD 90 emperor@naver.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