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박 대통령 친박 해체 선언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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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새누리당 내홍이 한심한 수준이다. 지도부 실종이 한 달 넘게 이어지더니 비대위 출범이 무산되자 이젠 서로 “네가 나가라”는 분위기다. 친박, 비박 두 계파는 어제 이 문제로 하루 종일 치고받았다. 친박 김태흠 의원은 “절이 싫으면 스님이 떠난다”고 압박했다. 혁신위원장에 내정됐다가 친박 비토로 물러난 비박 김용태 의원은 오늘 중 중대 발표를 하겠다고 예고했다. 친박계는 정진석 원내대표 책임론을 폈고 비박계는 친박 패권주의라며 반발했다. 와중에 정 원내대표는 사실상 당무를 거부해 새누리당은 식물 정당 상태에 빠져들었다. 국가 위기상황에서 집권당이 이 지경이니 기막힌 일이다.

물론 갈라서는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어차피 두 계파는 총선을 거치며 ‘정신적 분당’ 상태다. 당을 쪼개 새 정치질서를 만들고 유권자 심판을 받는 게 떳떳하고 당당한 길일 수 있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그렇게 헤어져 친박당이 생긴다 해도 쇄신과 혁신이란 국민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거다. 그게 총선 민의다. 새누리당은 집권당이 제2당으로 추락한 헌정 사상 초유의 대참패를 당했다. 이대론 못 믿겠으니 당의 구조와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란 게 유권자의 뜻이다. 그런데도 집권 친박세력에겐 아무런 변화가 없다. 총선 패배 3주일 만에야 정진석 당선인을 새 원내대표로 세우더니 그의 인선을 빌미로 비대위를 깨버렸다.

의회 권력이 야당으로 넘어가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는 어차피 가시밭길이다. 대통령이 주도하는 일방통행식 국정 운영과 불통 정치론 국정의 동맥경화만 깊어질 뿐이다. 또 여소야대 국회에서 이런 국정 운영기조는 유지하고 싶어도 할 수도 없다. 새누리당은 19대 국회에서 과반 의석을 갖고도 청와대 거수기 정도의 위상에다 국회선진화법 등으로 민생법안 하나 제때 처리하지 못했다. 국정 운영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할 집권당과 집권 세력이라면 과거와 다른 새 길을 찾아내야 한다. 총선 참패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바탕으로 친박 핵심 인물의 책임을 묻고 국정 운영 시스템을 바꾸는 게 첫걸음이다. 첫 발도 못 뗀 상태에서 “네가 나가라”니 이게 책임 있는 정치인이 할 소린가. ‘국회 심판이 총선 민의’란 식의 대통령 인식과 무엇이 다른가.

새누리당은 10년 전인 2006년 5·31 지방선거에 참패하고도 당이야 어찌되든 당권만 잡으려 했던 집권 친노세력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도 쇄신을 외면하는 건 오만과 독선이다. 오만과 독선의 정치가 박수 받은 역사는 없다. 친박은 지난 총선 때 자해성 막장 공천극으로 제2당 추락을 자초했다. 총선 뒤엔 ‘계파 해체’ 운운했고 대통령은 ‘친박을 만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보면 당엔 친박 패권주의만 더 노골화됐다. 새누리당 혁신의 첫 걸음은 친박 계파주의 청산이라는 게 보다 뚜렷해졌다. 이젠 당의 실질적 오너인 박 대통령이 친박 해체를 선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