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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따로 노는 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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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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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논설위원

발은 때로 입보다 많은 말을 한다. 『보디 랭귀지』의 저자 앨런 피즈는 사람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으면 그의 발을 보라고 한다. 내게 호감을 갖고 있고 진실을 말한다면 앉아 있는 그의 발은 내 쪽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반대라면 거짓이거나 적의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눈은 웃고 있지만 발은 다른 쪽을 향하고 있으면 나를 피하고 있다는 증거다.(『당신은 이미 읽혔다』)

조선·해운 구조조정이 산으로 가고 있다.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 전문가로 불리던 A 전 장관은 “이미 물 건너 갔다”고 단언한다. 그는 “우선 정부의 입을 보라”고 한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입이 중요한데, 구조조정이 대통령의 입에서 핵심 이슈로 거론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그저 ‘한국판 양적완화’만 말했을 뿐이며 이는 ‘돈이 있고 정권에 큰 부담이 안 되면 하라’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입은 유일호 경제부총리다. 총선 직후엔 “구조조정에 명운을 걸겠다”고 했지만 이후 횟수나 강도가 많이 약해졌다. 17일 국무회의에선 “구조조정을 위해 실업대책을 차질 없이 준비해야 한다”고 물러났다. 전쟁에 나간 장수가 안방부터 걱정하는 격이다.

입보다 중요한 건 발이다. 높은 분들의 입은 그렇다 치고 실무를 맡은 정부 구조조정 전사들의 ‘발’은 지금 어느 쪽을 향하고 있나. 과연 구조조정을 정조준하고 있나, 아니면 살짝 시늉만 내고 있나, 아예 발을 빼고 있나.

첫 번째는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발이다. 그는 윗사람의 심기를 꿰뚫는 재주로 유명하다. 관가에선 그의 발이 가는 곳이 곧 윗사람의 관심사요, 중점사업이란 얘기까지 나온다. 구조조정 이슈가 달아오른 지난달부터 그의 발은 정신없이 바빴다. 이란·이집트에 갔으며,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 대통령에게도 갔다. 대통령을 수행해 화려한 조명 아래서 양해각서(MOU)에 잔뜩 서명했다. 하지만 그의 발은 거제·울산엔 가지 않았으며 아예 그쪽을 향하고 있지도 않다.

조선·해운 구조조정의 핵심은 사람 자르고 돈 넣는 게 아니다. 구조개혁이며 산업개혁이다. 국가의 먹거리를 다시 짜는 작업이다. 조선·해운의 앞날부터 그려내야 한다. 수요·공급과 신기술 경쟁력까지 따져 산업 재편 시나리오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돈도 넣고 사람도 자를 수 있다. 그게 바로 지금, 이 땅의 산업부 장관이 꼭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주형환의 산업부는 그 일에서 쏙 빠져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해운은 우리 쪽 관할이 아니며 조선은 산업은행 것, 산은이 주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평소 규제 권력은 웬만하면 다 자기 거라던 그 산업부가 맞나.

두 번째는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다. 그의 취임 일성은 “선제적 구조조정”이었다. 하지만 현대상선 구조조정의 최대 난제인 용선료 협상만 봐도 ‘선제적’과는 거리가 멀다. 협상단의 지원요청에도 산은은 그간 나 몰라라 했다. 그러다 어제 처음 산은 부행장이 마지못해 참석했다. 해외 선주들이 결정권을 쥔 산은이 직접 나서라고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럴 땐 결기 있게 이 회장이 나서야 했다. 부행장을 보내 시늉을 내고 관전평을 쓸 때가 아닌 것이다. 외환위기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LG 구본무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직접 설득했다. 두고두고 논란을 빚긴 했지만 그 한 수로 LG는 반도체를 포기했고, 빅딜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책임자가 책임을 진다는 건 이런 것이다.

세 번째는 임종룡 금융위원장이다. 직책상 어쩔수 없이 야전사령관 총대는 멨지만 발은 붕 떠 있다. 군비 조달은 지지부진, 공격 목표도 오리무중인데 고매한 정치권에선 사상자도 내면 안 된단다. 이래서야 용 빼는 재주라도 발을 밀어넣기 어렵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결과는 뻔하다. 조선·해운은 최후의 일각까지 국민 혈세를 집어삼키며 말라죽어 갈 것이다. 뇌사 상태로 병원비만 축내는 환자처럼.

이러니 구조조정이 물 건너 갔다는 얘기가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 함께 뛰어도 어려운 게 구조조정이다. 따로 노는 발들로는 결코 구조조정의 깊고 험한 강을 건널 수 없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