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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행정지대의 산사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이번 장마 폭우로 발생한 부산 문현동 황령산 산사태는 이미 예상된 참변이란 점에서 천재를 원망하기보다는 인재를 탓해야할 것이다. 쏟아지는 폭우로 산사태위험을 눈앞에 보면서도 예방과 대피가 완벽·철저하지 못하고 엉성해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우선 40명에 가까운 인명이 희생된 직접적인 동기는 대피·관리의 소홀이다. 피해지역 일대 주민들은 사고당일 산사태가 날것에 대비하여 관할 동에서 대피를 종용하여 일찌기 대피하고 있었으나 비가 잠시 뜸해지자 집에 두고온 가재도구를 챙기러 간 사이에 일어났다.
값나가는 물건들을 빈 집에 놔두고 나온 사람들의 불안한 심사야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위험을 피해 나온 지역을 위험이 계속 되는 상태에서 뛰어든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행정당국이 옆에서 보고만 있었다면 이 또한 책임을 면키 어렵다. 평소에 민방위훈련이나 대피연습은 이런 상황도 가정됐어야 했을 것이며 지역민방위대원들은 이때에 무엇을 하고있었는가.
재난 속에서 재산 한가지라도 더 건져내겠다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면 이들을 만류하고 제지하여 생명의 위험에서 보호하는 것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과 행동을 취할 수 있는 행정기관이나 조직의 역할이어야 할 것이다.
평소 예방대책의 불비는 보다 원천적인 문제점이다. 사고가 난 황령산은 토질이 모래가 많이 섞인 마사질이기 때문에 물이 스며들면 저절로 무너져 내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비만 약간 많이 내리면 흙이 조금씩 무너져 내려 평소에도 주민들이 불안을 느껴왔고 동에서도 관심을 기울여온 곳이다.
부산시에서는 이곳에 나무를 심었으나 아직 뿌리가 제대로 활착하지 못해 산사태 예방에는 도움을 주지 못한 것 같다. 산을 깍아낸 절개지라면 마땅히 시멘트 콘크리트로 옹벽을 만들거나 축대를 쌓았어야 했을 것이다. 위험을 눈앞에 뻔히 보면서도 이를 나무 몇 그루 심는 식의 눈가림으로 적당히 얼버무려 오다가 결국은 참변을 당하고만 것이다.
따라서 이번 참사는 일선 행정당국의 재해위험지역이나 취약지구에 대한 사전 점검, 그리고 이에 따른 예방대책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사고지역 주민들은 최근까지 수 차례에 걸쳐 산사태에 대비한 안전대책을 세워줄 것을 행정당국에 요구해 왔으나 묵살 당했다고 하니 행정당국의 서민대책이 형식적이고 구호에 그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사고지역은 6·25 사변후 피난민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 산동네로 지금까지 무허가 주택지였으나 작년에 그중 일부를 양성화했다. 적절한 행정이 뒤따르지 않은 무리한 양성화가 빚은 참사라는 일면도 있다.
장마는 계속되고 있다. 현재는 남부지방에서 장마전선이 머무르고 있으나 언제 전국으로 확산될지 예상을 불허한다. 사고가 난뒤에 사후대책이니 구호니 하는 법석을 떨지 말고 사전 철저한 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전국적으로 재해위험지대와 취약지구를 면밀히 점검해 문제가 있는 지역은 과감하게 정리함으로써 이 같은 참변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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