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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영화] 뻔한 설정, 그러나 따스한 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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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면

주연:카메론 디아즈·토니 콜레트
장르: 드라마
등급: 15세
20자평: 식상한 대립, 볼 만한 화해

살아 보면 알게 되는 일이지만 결혼이든 연애든 결코 당사자 두 남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깨달음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최근 개봉하는 할리우드 로맨스 물에는 대부분 가족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다. 한국 영화의 로맨스가 갈수록 가족을 배제하고 두 남녀에 집중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다.

지난 연말 개봉했던 '프라임 러브'에서는 연상의 이혼녀(우마 서먼)와 사귀는 미혼의 아들을 둔 엄마(메릴 스트립)의 입장이 드라마를 한층 풍성하게 했다. 뒤이어 개봉한 '우리 사랑해도 되나요'는 동성연애자인 아들을 포함, 다섯 자녀를 두루 감싸안는 엄마(다이앤 키튼)의 넉넉한 품 덕분에 도시 깍쟁이인 예비 며느리감(사라 제시카 파커)도 굳은 표정을 풀고 온전히 제 짝을 찾았다.

특히 괄호 안에 소개한 여배우들의 이름 가운데 나이 든 쪽을 주목하시라. 메릴 스트립과 다이앤 키튼은 자식들의 연애에 구색 맞추기로 등장하는 엄마 역할을 넘어서 각 영화의 핵심을 드러내는 비중 있는 역할로 중년 여배우의 이름값을 했다.

'당신이 그녀라면'(12일 개봉) 역시 이런 구도로 풀이해 볼 만한 영화다. 여기에는 대조적인 두 여자가, 자매관계라는 점에서 갈등이 출발한다. 똑똑하고 공부 잘해 변호사가 됐지만 외모와 연애에는 영 자신이 없는 언니 로즈(토니 콜레트)와 섹시한 매력을 한껏 발산하지만 간단한 산수나 읽기도 제대로 못해 변변한 직업이 없는 동생 매기(카메론 디아즈)가 그 주인공이다. 이런 식으로 여자의 유형을 대비시키는 설정은 식상하기 짝이 없지만, 이 다음의 전개가 이를 만회한다.

언니가 어렵사리 연애 중인 남자와 일종의 '사고'를 친 뒤, 언니네 집에서 쫓겨난 매기는 우연히 행방을 알게 된 외할머니 엘라(셜리 매클레인)를 찾아간다. 엘라는 정신질환을 앓던 딸을 사고로 잃고, 새 장가를 든 사위와 인연을 끊고 남편과도 사별한 뒤에 은퇴한 노인들의 집단거주지에 사는 중이다. 이런 동네에서도 비키니를 입고 활보할 만큼 천방지축인 매기를 엘라를 비롯한 노인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길들여 가는 과정은 이 영화의 진짜 재미다. 언뜻 무기력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 듯 보여도 젊어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쌓아온 노인들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 점차 드러난다.

환갑을 넘긴 여배우 셜리 매클레인에게서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1960년) 같은 모습을 찾아내려는 것은 부질없는 시도다. 대신 엄격한 듯하면서도 통찰력이 엿보이는 눈빛은 여배우라는 직업의 정년이 생각처럼 짧지 않다는 것을 웅변하기에 충분하다. 엘라는 자매간의 불화를 눈치채고 그 화해를 주선하는 것은 물론이고, 로즈의 연애 성공을 계기로 이 영화의 결말에 벌어지는 가족 전체의 화해에 기꺼이 한 당사자로 참여한다.

여기서 영화의 원제(In Her Shoes)가 뜻하는 바를 짐작해 보자. 외모에 자신이 없는 로즈의 신발장에는 사 두고 신지 않는 멋진 구두가 가득하다. 언니가 애지중지하는 그 구두를 거침없이 신고 나가는 동생 매기는 욕망에 충실한 인간형을 잠시 대변한다. 이런 매기의 등장 덕분에 노인들에게 잠재해 있던 욕망이 깨어나는 대목은, 거꾸로 매기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주고받는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그려내는 점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미덕으로 꼽을 만하다. 감독 커티스 핸슨은 '요람을 흔드는 손' 'LA컨피덴셜' '8마일'등의 전작과는 전혀 다르면서도 나름대로 볼 만한 소품을 만들어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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