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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성주 도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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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도씨는 성주 단일본이다.
전국에 3만여명, 성별인구순위 65위의 귀성.
고려 명종때의 전리상서 도순을 득성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삼강행실도 등 여러 문헌에는 순이전 인물로 도도·도비·도눌최·도유·도조·도미·도진 등이 등장한다.
그중 도조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맏아들 유리가 이복동생 비류·온조 등과 왕권쟁탈전을 벌일 때 크게 활약, 유리를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
백제 개루왕때의 정승 도미는 부인이 아름답고 정숙하기로 나라안에 소문이 났다. 왕이 그 소문을 듣고 그의 아내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하자, 미의 두 눈을 도려낸 다음 배에 태워 멀리 추방해 버렸다. 미는 고구려 땅에 가서 나물과 풀뿌리를 캐 먹으며 살다가 뒤쫓아온 아내와 다시 만나 해로했다 한다.
현재 미의 무덤은 경남 웅천에 있어 이 지방에서는 누구나 8월 초하룻날 제일먼저 벌초를 하면 득남한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도진은 고려 개국공신. 대조 왕건은 정승의 벼슬을 주고 성산부원군에 봉함과 아울러 논밭 8백경을 주었다. 성주(팔거)가 도씨의 관향이 된 연유다.
시조 순은 충박을 아들로 두였는데 그는 고려 원종때 전리상서를 지냈다.
3세 유덕·유도 두 형제도 공조전서와 명경진사에 각각 올랐다.
전국에 분포된 도씨들은 모두가 이들의 후손으로 경북 울진·달성·군위·성주·청도·경남 고성·산청·거창·충북 청주·청산·충남 천원 등지에 흩어져 살고있다.
고려조의 도씨 인물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6세 홍정. 그는 공민왕때 시중에 오르면서 정계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그의 아들 길부도 우왕때 찬성사를 역임한 무신으로 당시 세도가 이인임의 인척이었다. 길부는 1380년 왜구가 대거 침입해 충청·전라도가 큰 화를 입게되자 이성계 등과 함께 충청도에서부터 전쟁을 시작해서 지리산에서 왜구를 완전히 격퇴했다. 황산대첩이다.
그러나 이인임이 실각하는 정변에서 일파로 몰린 그는 죽음을 당하고 일족이 풍비박산이 되어 곳곳으로 흩어지게 됐다. 도씨네들은 이 참변을 「기사화변」이라고 부르고있다.
아들 청송당 응은 여말을 대표하는 도씨 인물. 찬성사를 지냈는데 이태조와 가까운 친구로서 기사화변 때 장인(우인렬)의 덕으로 화를 피한 뒤 세상이 싫어져 홍주 노은동에 은거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뒤 옛정을 못잊어 상장군에 임명하고 두번이나 예물을 보내 벼슬살이를 권했지만 모두 돌려보냈다. 그 뒤에도 이성계는 다섯차례나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의 지조를 지켰다. 감복한 이성계는 청송당이란 호를 내려 그의 절의를 기렸다고 한다.
흥은 공민왕때 무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전라도 도순문사가 되었는데, 왜구의 침입을 막지 못한 혐의로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왜구의 방어에 공을 세웠으며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의 일파로 몰려 유배를 당했다.
연은 여말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조선조에서는 15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응유·성유·여유·신수·신징 등 이름난 학자가 많다.
응유는 인조 이괄의 난 때 의병장이 되어 활약했고 정묘호란에는 소모장이 되어 공을 세웠다.『왕현예세』을 편찬했으며 대구 병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성유는 성리학자로 임신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왕경체용합일도』와 『체용각분도』를 만들었다. 대구 용호서원에 배향됐다.
서재 여유·지암·신수·죽헌 신징 3부자는 당대의 성리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여유는 이괄 난 때 향병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공이 컸고 병자호란 후에는 산림에 묻혀 후진양성을 낙으로 삼았다.
맏아들 신수는 인조때 문과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함흥부사로 선정을 베풀었고 만년에는 고향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둘째 신징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유림에서 명망이 높았고 특히 예제에 밝았다.
그는 현종때 인선황후가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일어나 대공세로 예론이 기울어지자 상소하여 이를 맹렬히 반대, 기년세(만1년)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그 뒤 강릉삼봉에 이어 주부를 거쳐 용궁현감으로 나가 치적을 올려 통훈대부에 승진했다.
이밖에 조선조 인물로는 형·경유·인엽·석훈·진삼 등으로모두 학자들이다.
형은 중종때 문두 급제, 정언이 되었는데 효행이 지극했고 경유는 정묘·병자호란 때 크게 활약했다.
학문·도덕의 가풍은 현대에도 이어져 주로 학계·의학계에 많이 진출하고 있다.
특히 서울대교수와 국전심사위원장을 지낸 서양화가 도상봉은 우리나라 구상회화를 정착시킨 선구자. 현존 인물로도 제1공화국 때 정계에서 활약한 도진희(전 국회의원), 전 서울지검 남부지청장을 지낸 변호사 도태구, 미 하버드대연구원인 도영규(공부), 동아대상경대학장 도우현, 서울올림픽 준비위 시설국장 도인환, 육사교수 도철웅 등이 각계서 도씨의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지명인사>
(종친회제공·무순)
▲도영규(공학박사·미하버드대수석연구원) ▲도우현(동아대상경대학장) ▲도태구(변호사) ▲도재용(서울교통교육원장) ▲도창기(의박·대구도남내과병원장) ▲도한복(한국벨트사장) ▲도규만(대구지검의성지청장) ▲도영심(국회외무위전문위원) ▲도준호(조선일보사회부차장) ▲도철웅(육군대령·육사교수) ▲도상호(육군대령) ▲도홍기(해군대령) ▲도명정(올림픽기획단기획관) ▲도유헌(서울지법북부지원사건과장) ▲도진환(송현여고교장) ▲도태기(상주중동중교장) ▲도상용(마산중앙조선사장) ▲도흥렬(국방대학원교수) ▲도갑수(숭전대교수) ▲도창회(동국대교수) ▲도광형(한양대교수) ▲도덕현(건국대교수) ▲도동섭(고대교수) ▲도재은(연대교수) ▲도기계(부산판유리대표) ▲도재철(영남대교수) ▲도명기(동) ▲도수희(충남대교수) ▲도영주(부산대교수) ▲도영회(현대상선 전무이사) ▲도인환(서울올림픽조직위시설국장) ▲도재문(국회건설위입법조사관) ▲도재호(대구시기획담당관) ▲도상길(서울시경상황실장) ▲도종웅(국립의료원신경외과과장) ▲도사금(대구파티마병원내과과장) ▲도원회(롯데지과이사) ▲도범회(대우이사) ▲도진규(산은서무부장) ▲도재근(서울신탁은지점장)
▲도기갑(한국조폐공사기획부장) ▲도상학(동덕여대교수) ▲도재욱(병원장) ▲도병권(청주교대교수) ▲도형수(계명대교수) ▲도복품(경북대교수) ▲도재린(병원장) <다음차례는 청주 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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