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국교 2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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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일협정 체결 20돌을 맞았다. 그것은 왜곡된 역사관계로 인한 왜곡된 현실관계를 바로 잡아 놓은 한일사의 새로운 일장이었다. 이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양국은 숱한 신고를 겪었다. 정부차원에서는 정치생명을 건 일대 모험이었다.
우리의 경우 2년여의 범국민적 반대운동으로 위수령·계엄령이 선포되고 대학에 군이 진주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일련의 한일관계 협정과 조약들은 야당의원들의 탈당, 사퇴, 그리고 끈질긴 저지소동 속에 공화당의원만의 심야회의에서 전격 처리됐다. 이 같은 과정은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양국은 그 어려움들을 극복해내는데 성공했다. 그 때문에 지난 20년간 양국의 우호관계나 국내경제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양호하고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근대화 추진을 본격화한 것은 한일수교가 이룩된 65년 이후였다. 당시 한국의 1인당 GNP는 1백5달러였고 수교 74개국에 상주공관수는 40개에 불과한 후진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2천1백35달러(85년 목표)를 바라보면서 1백22개국과 수교, 1백21개 상주공관을 운영하는 중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일본도 65년의 경우 1인당 GNP 5백87달러(세계 19위)의 중진국이었던 것이 16배의 성장을 보며 지금은 9천20달러 (84년말)를 기록하는 선진국이 됐다.
그러나 오늘의 양국관계가 한일협정의 기본정신인 우호선린과 호혜평등의 길을 만족할 만큼 걷고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우선 갈수록 심화되는 무역역조 문제다. 65년의 경우 우리는 1억4천만달러의 입초를 기록, 3·8대1의 역조를 빚었다.
그러나 작년 한해 우리의 대일역조는 30억달러를 넘어 수교이후의 누적적자는 3백억달러에 이르고 있다.
한국은 일본의 제2수출국인데 비해 일본은 한국의 9번째 수출국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도 일본은 한국의 대일수출 주종상품에 대한 관세율을 평균 관세율보다 높여 시장폐쇄·보호무역주의로 임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급격히 자본을 축적한 일본이 65년을 전후하여 자본과 상품을 대외적으로 팽창해 나가야할 절실한 사정에 직면했었다. 바로 그때 한국이 일본에 대해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일본은 잊지 말아야한다.
다음은 기술교류 문제다. 62년 이후 한국은 일본에서 1천7백46건의 기술을 도입, 전체 도입의 55.2%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것은 초보적인 응용기술 중심의 기술이전에 불과하다. 우리의 기술수입 로열티의 일본부분은 32%인 반면 미국으로부터의 기술수입률은 23·1%이면서도 그 로열티는 42%가 된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그 같은 낙후된 초보적 기술이 아니라 첨단기술이다. 첨단기술의 이전은 타산적 고려를 벗어나 인류복지를 위한 문화교류의 차원에서 고려돼야 한다.
다음은 재일교포의 법적지위 문제다. 우리교포는 일본의 필요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이거나 그 후손들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국제법과 국제관례를 무시하고 범죄자와 똑같은 방식의 지문채취를 강요하고 불응자엔 국외추방을 위협하고있다.
그 같은 비인도적·비합리적인 악법이 존재하는 한 진정한 한일우호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일본의 대북한관계에도 우리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북분단의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의 한국점령에 기인한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의 대북정책은 오히려 우리의 통일노력에 저해될 우려가 없지 않다. 일본의 대북정책은 우리국가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미묘한 문제인 만큼 우리 정부와 사전협의를 거쳐 신중히 처리돼야한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과 발전이 일본에 의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할 생각도 없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이 해야할 과제다.
일본이 우리의 좋은 발전모델임엔 틀림없다. 우리는 스스로 노력하고 개척하여 일본을 따라잡고 넘어설 때 우리는 진정한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응분의 성의와 함께 우리의 자조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것이 한일협정 20돌을 맞는 우리의 절실한 경험이요,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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