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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에도 무료급식에 늘어선 줄…탑골공원·종묘공원의 쓸쓸한 풍경

중앙일보

입력

어버이날인 8일 오전, 종묘공원에는 100여명이 넘는 노년층들이 모여 바둑을 두거나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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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겨줄 자식도 없는데 어버이날은 무슨… 무료급식은 매일 있으니까 끼니나 때우러 왔어. 매년 있는 날인데 뭐 별스러운 게 있겠어.”

김모(70)씨는 씁쓸한 표정으로 종묘공원 한 편에서 바둑판을 들여다보다 대수롭지 않은듯 말했다. 김씨는 “사업 실패하고 공사판을 돌다 보니 자식들은 뭐하는지도 모르겠고, 지금은 나라에서 준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한다”고 덧붙였다.

평소 독거노인들이 몰리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에는 어버이날인 8일에도 이른 아침부터 발길이 이어졌다. 오전 9시 탑골공원이 문을 열자마자 30분도 채 안돼 20~30명의 노인들이 공원으로 모여들었고, 같은 시각 종묘공원 주변에도 50명 넘는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평소처럼 바둑판을 펼쳤다. 공원 주변을 돌며 박스 등 폐지를 주워 모으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은 노년층이 대부분이었다.

종묘공원 입구 나무그늘에서 더위를 식히던 박모(70)씨는 “무료급식은 365일 쉬지 않고 해주니까 평소처럼 점심이나 먹으려 공원에 왔다”고 말했다. 박씨가 “사는 꼴이 말이 아니다”라고 말을 덧붙이자, 곁에 있던 김모(68)씨가 “어버이날이라고 카네이션 달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우리끼리라도 하나 달자”고 말하며 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짧게 꺾어 박씨 상의에 달린 주머니에 꽂아 주기도 했다.

탑골공원을 산책하던 류모(69)씨도 “평소 같으면 일요일엔 집에서 쉬거나 잠을 자는데, 오늘은 어버이 날이라 그런지 아침 일찍 잠이 깼는데 쓸쓸한 기분이 들어 공원에 나왔다”며 “4년 전 이혼한 뒤 혼자 살며 딸 세 명이 각각 한달에 5만원씩 보내주는 용돈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이혼한 뒤로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보여주며 “1월에 딸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아직 읽지도 않고 답장도 없다”며 “예전엔 부모자식 간 뗄 수 없는 정이란 게 있다고 믿었는데, 지금은 그냥 내가 자식들에게 연락하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게 최선인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전 11시 30분쯤, 탑골공원 뒤 원각사 건물에서 무료급식이 시작되자 금세 줄이 길게 이어졌다. 원각사 무료급식소 관계자는 “평소에 200여명 정도 오는데, 어버이날인 오늘도 180명은 넘게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오후가 되자 공원을 찾는 노년층들이 더 늘어 종묘공원 입구에만 약 150여명이 모였다. 역시 자녀와 연락이 닿지 않는 독거노인들이 많았지만, 부양해주는 자녀가 있어도 부담주기 싫어 일부러 혼자 공원에 왔다는 노인들도 있었다.

왼쪽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공원에 온 김모(89)씨는 “어제 저녁 막내 며느리가 3년 만에 찾아와서 어버이날이라고 카네이션을 주고 갔다”며 “집에 같이 먹을만한 음식도 없고, 이렇게 늙어서까지 도움은 못 주고 살아 있는 게 미안해서 그냥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그는 “밥 때가 되면 집에가서 끼니를 해결하고 다시 공원에 나오며 생활한지 7년째라 그냥 여기 오는 게 제일 편하다”고 말했다.

자녀들은 지방에서 일하며 정착했고 자신만 사업 때문에 서울에 있다는 황모(72)씨도 “지난달에 얼굴 봤는데 굳이 또 올라 올 필요 없으니 그냥 혼자 있겠다고 했다”며 “여기 오면 친구들도 많은데 괜히 자식들 부담주면 요즘 같은 세상에 자식들이 부모 모시려고 하겠나”라고 말했다.

윤정민·정진우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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