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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재현의 시시각각

가습기 살균제 둘러싼 슬픈 가족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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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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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현우(68) 전 옥시 대표는 우리나라 화학제품 업계의 선두 주자였다. 경기고,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나와 OCI 전신인 동양화학공업에 입사했다. 그는 섬유제지 표백제 등 각종 화학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데 공을 세웠고, 합성섬유 원료를 국산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43세 때인 1991년부터 옥시의 대표를 맡았던 그는 2001년 가습기 살균제인 ‘옥시 싹싹 가습기 당번’을 만들어냈다. 에어컨의 먼지와 곰팡이 냄새를 제거하는 에어컨 청소당번 등도 이 회사 제품이다. 영국 레킷벤키저(RB)에 회사가 매각된 뒤에도 2005년까지 한국 법인 대표를 지냈다. 그는 이 때문에 “국민의 건강을 담보로 사적 이익을 추구했다”는 비난과 함께 ‘공공의 적’이 됐다.

그의 또 다른 괴로움은 자신 때문에 아들의 건강이 악화될지 모른다는 걱정이다. 33세의 아들은 전신이 마비되는 척추성근위축증이란 희귀병을 앓고 있다. 눈과 입만 움직일 수 있어 마우스로 모든 의사를 표현한다. 태어난 지 7개월째부터 발달 장애 증상을 보이다 지금은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 2011년 아들이 사립대 컴퓨터 관련 학과를 9년 만에 졸업할 때 언론은 ‘영국판 호킹’으로 보도했다.

# 홍수종(56) 서울아산병원 소아과 의사는 호흡기 면역학 전공이다. 그가 ‘기이한 질환’을 처음 접한 것은 2006년이다. 옥시가 가습기 살균 제품을 내놓은 지 5년째 접어들었을 때다. 그해 봄 정체를 알 수 없는 폐렴 증세로 12명의 아이가 입원하면서 그의 연구가 시작됐다. 겨울에 집중적으로 가습기를 틀기 때문에 봄이 되면서 호흡기 계통에 문제가 생긴 환자가 집중된 것이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나타난 소아 호흡질환자의 유형과 다른 데다 사망률이 상당히 높아 의사로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듬해 똑같은 증상의 어린이 환자들이 또 입원을 했고 2008년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발생했다. 그는 폐질환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했고 다른 병원에도 연락해 유사 환자들이 있는지를 수소문했다. 수백 건의 관련 자료와 수만 건의 폐 CT 사진을 보면서 그는 가습기 살균제가 질병의 원인임을 밝혀냈다. 2011년 질병관리본부가 가습기 살균제 사용을 자제해 달라고 발표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도 특별한 이유 없이 얼굴이나 목·어깨 등 신체 일부를 아주 빠르게 반복적으로 움직이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는 ‘틱장애’를 한때 앓았던 아들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사물에 대한 인식에 예민했고 강박 증세도 심했던 것이다.

# 김덕종(40)씨는 경북 구미에서 소방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첫째 아들이 태어난 2005년부터 옥시 제품의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 소방관이란 직업 특성상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해 가습기라도 깨끗하게 작동시켜 주고 싶었던 마음에서다. 퇴근하면 가습기에 물을 채우고 살균제를 집어 넣었던 자신이 부끄럽고 죄책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의 아들은 2009년 5월 7일 ‘원인 불상의 폐질환’으로 숨졌다. 하지만 김씨 가족은 정부 발표가 있었던 2011년까지 가습기 살균제를 계속해 사용했다. 그는 “공무원 신분 때문에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지만 소방관 이전에 부모이고 자식을 잃은 부모의 입장에서 늘 힘들다”고 말했다. 영국 본사를 찾아 항의 농성을 벌이고 있는 그는 “어린이날에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아이의 기일이 코앞에 있어 많은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가습기 살균제를 개발한 기업가, ‘악마의 물질’임을 밝혀낸 의학자, 영문도 모른 채 아들을 보내버린 소방관 모두 안타까운 가족사를 갖고 있다. ‘아들의 이름으로, 부모의 이름으로’ 슬픔에 맞서려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진실이다. 미처 피지도 못한 채 산화돼 버린 희생자와 그 가족들에게 삶의 허무만 안겨줘서는 안 될 것이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를 이들은 알고 싶어 한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안부를 전할 것이다. “슬픔아 잘 지내라고….”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