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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서류만 책 한 권…‘십시일반’ 투자 쉽잖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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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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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윤택한(30)씨는 지난 2월 증권형 크라우드펀딩 중개업체인 와디즈에서 신생 기업 두 곳에 400만원을 투자했다. “유망해 보이는 비상장기업이 많아 투자를 결심했지만, 쉽고 빠르게 투자할 수 있는 일원화된 창구가 없어 불편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총 2343명 참여, 58억원 투자
32곳 모금 성공 자금 갈증 해소
스타트업 “문서 준비하기 힘들다”
투자자는 “보호 장치 빈틈 많아”
금융위, 시장 활성화 개선안 마련

증권형 크라우드펀딩이 시행 100일(5월 3일)을 넘기면서 그간의 성적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4일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100일 동안 총 2343명의 투자자가 73개 기업에 57억7000만원을 투자했다. 이 중 32개 기업이 모금에 성공해 성공률 43.8%를 기록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이날 출범 100일을 기념한 현장 간담회에서 “자금에 목말라 있던 신생 기업에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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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업계의 목소리는 좀 다르다. 한 크라우드펀딩 업계 관계자는 “기대한 만큼의 성적은 아니다”며 “아직 정부부처, 중개업체, 투자받는 기업 간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해양 생물에서 콜라겐을 추출해 화장품을 생산하는 마린테크노는 시행 첫날 목표 금액인 8000만원을 채운 ‘1호 성공기업’이다.

이 회사 황재호 대표는 “회사가 전남 여수에 있어 투자받는 게 쉽지 않았는데 펀딩에 성공한 이후 투자사와 유통사의 연락을 많이 받았다”고 장점을 말했다.

하지만 “목표 금액의 80%를 채우지 못하면 1원도 투자받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기업의 임원 역시 “홍보와 마케팅에 큰 도움이 됐다”면서도 “눈에 보이는 제품 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참여하기에는 진입장벽이 높은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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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개사이트 등록 절차에 대한 불만도 나왔다. 한 기업 CEO는 “정부기관에서 ‘준상장기업’이라 생각하고 임하라고 한다”며 “투자자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는 건 알지만 책 한 권에 가까운 문서를 준비하다 보면 작은 기업으로서는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한숨을 쉬었다.

목표 금액을 5억원으로 높게 잡아 펀딩에 실패한 싸이월드의 김동운 대표는 “몇 년 동안 사업을 해온 싸이월드 역시 어려움을 느꼈다”며 “스타트업이라면 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회사 규모나 업력, 목표 금액에 따라 구간을 나눠 규정을 세분화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내기도 했다.

금융위는 시행 초기부터 “절차를 최대한 간소화한 것”이라는 입장을 지켜 왔다. 최근 모바일로 펀딩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하고 후속 투자를 위한 펀드를 조성하는 등 시장 활성화를 위해 나름의 개선안을 마련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 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해외와 달리 크라우드펀딩 기업에 상장기업과 비슷한 규제 수준을 요하는 예탁 방식을 적용한다”며 “기업들이 서류 제출을 위해 여의도 한국예탁결제원에 몇 번이나 가야 하는 등 행정상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투자자인 직장인 윤씨가 지적한 일원화된 사이트가 없다는 점 역시 업계에서 동감하는 부분이다.

익명을 요구한 관계자는 “한국예탁결제원이 새롭게 연 사이트 ‘크라우드넷’은 업계 사람들도 자주 들어가지 않는 편”이라며 “여기에 IBK기업은행이 신생 기업과 중개업체를 연결해 주는 ‘기업투자정보마당’을 또 새롭게 만들어 투자자들이 혼란을 느낀다”고 말했다.

형식적인 요건을 강조하면서 정작 투자자 보호에서 빈틈을 보인다는 지적도 나온다. 천창민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에서는 크라우드펀딩 규칙 에 따라 발행 기업의 임원이나 주요 주주가 증권 범죄를 저지른 경력이 있으면 펀딩에 참여할 수 없지만 한국은 해당 사실을 공시만 하고 투자자들에게 판단을 맡긴다”고 말했다. 그는 “목적이 투자자 보호라면 범죄기록을 좀 더 큰 글씨나 다른 색으로 표기하는 식으로 강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불분명한 광고 규제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현재 투자자나 중개업체가 기업의 펀딩 사실을 알리는 것과 관련해 명확한 규정이 없다. 천 연구위원은 “투자자 보호 등 일부 규제는 강화하고, 회사당 투자한도 제한(한 회사당 200만원) 같은 지나친 규제는 완화하는 ‘운용의 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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