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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스승 쉬터리 ‘독서 파산 계획’ 8년 만에 무일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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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호 32면

1 말년의 쉬터리. 혹독한 세월을 거친 노인 티가 전혀 없었다.

원로(元老) 소리는 아무나 듣는 게 아니다. 연로하고 경력이 화려해도, 손아랫사람 트집잡기 좋아하고, 돈 몇 푼 때문에 자리 보전에만 급급하면, 원로 소리는커녕 한적한 곳에서 젊은 사람에게 얻어 터지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국·공 양당은 이합집산 일삼는 3류 정객들의 집결지가 아닌, 당당한 혁명정당이었다. 원로 소리 듣기에 손색없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국민당은 장징장(張靜江·장정강), 차이위안페이(蔡元培·채원배), 우즈후이(吳稚暉·오치휘), 리스쩡(李石曾·이석증)을 4대원로(四大元老)라 부르며 추앙했다. 네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중공도 옌안(延安)시절 쉬터리(徐特立·서특립), 셰줴짜이(謝覺哉·사각재), 둥비우(董必武·동필무) 린보취(林伯渠·임백거), 우위장(吳玉章·오옥장) 등 5대원로(五大元老)가 있었다. 흔히들 ‘5로(五老)’라고 불렀다. 옌안 5로도 국민당 4대원로처럼 비슷한 점이 많았다. 허구한 날 붙어 다니지 않아도 관계가 밀접하고 원만했다. 만날 때마다 낯 붉히고 헤어지는 법이 없었다.


5로는 모든 사람에게 신망이 두터운 노혁명가였다. 각자 분야는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다. 커가면서 신학문도 배척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독한 독서가였다. 독서가 생활의 한 부분인 것은 물론이고 독서 경력이나 학풍·방법도 비슷했다. 말이나 행동에서 전통 사대부의 체취가 물씬 풍겼다.

2 항일전쟁 시절 후베이성 우한의 중공 주재지에서 회의에 참석한 동비우(왼쪽 두번째)와 우위장(오른쪽 첫 번째). 왼쪽 첫 번째는 회의를 주재하는 예젠잉(葉劍英·섭검영).

쉬터리는 1877년 2월 1일,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태어났다. 1937년 중공의 혁명 성지 옌안, 쉬터리의 60회 생일이 임박했다. 1월 31일 밤, 중공 영수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오랜만에 붓을 들었다. 일필휘지, 은사에게 보낼 축하 서신을 직접 작성했다.


마오쩌둥은 다음날 열린 생일 잔치도 직접 주관했다. 고향 풍속대로, 잘 만든 모자와 홍색 실로 여민 돈 봉투를 두 손으로 정중히 올리며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축사도 빠뜨리지 않았다. “사범학교 시절,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 두분 있었다. 한 분은 양화이중(楊懷中·양회중) 선생이고, 다른 한 분은 쉬터리 선생이었다. 양화이중 선생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다. 쉬선생은 퇴학당할 뻔한 나를 세 번이나 구해줬다. 그 덕분에 학업을 제대로 마칠 수 있었다. 선생은 예전에 내 스승이었고, 지금도 내 스승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내 스승이다.” 양화이중은 마오의 첫 번째 장인이었다. 마오가 착석하자 전우 겸 프랑스 유학 동기인 옛 제자들의 축사가 줄을 이었다.


쉬터리는 꽃과 책을 좋아했다. 청년 교사시절 ‘십 년 독서 파산 계획’을 세웠다. 매년 받는 봉급 중 생활비를 뺀 나머지는 책을 구입했다. “꽃과 책처럼 아름다운 것도 없다. 꽃 구경하는 사람과 책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뭔지 깨우치려면 독서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꽃 구경은 돈이 안 들지만 책에는 돈이 많이 든다”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답도 처분했다. 1897년, 스물 세 살 때였다.


돈이 생기자 고가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구입했다. 값도 깎지 않았다. 남이 주는 책은 사양했다. “책은 제 돈 주고 사야 보게 된다.” 파산계획은 10년을 채우지 못했다. 8년 만에 무일푼이 됐다. 8년 독서는 의외의 결과를 초래했다. 명문학교에서 초빙이 잇달았다. 가족들 끼니 걱정은 잠시였다.


쉬터리의 독서는 효과를 중요시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세상 이치가 뭔지 모르는, 허황된 사람들이다. 무슨 일이건 결과가 있어야 한다.” 제자들에게 방법도 제시했다. “책은 사람과 비슷하다.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과 없어야 될 사람은 극소수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대화 나누다 보면 즐거움보다 재미만 있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책도 흥미만 유발시키는 책이 더 많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건성으로 읽는 것은 시간 낭비다. 그냥 열 권 읽느니, 그 시간에 한 권 정독하는 편이 낫다.”


독서를 많이 한 쉬터리는 인간사 별게 아니라는 것을 진작 깨달았다. 매사에 침착하고 젊은이들에게 관대했다. 혁명시절이다 보니 평소라면 해서는 안될 일을 부득이 하게 할 때도 야비하지 않고 품위가 있었다. 독서 덕이었다.


중공 창당 대표 둥비우는 평생을 박람군서(博覽群書)로 일관한 사람다웠다. 80세 생일을 앞두고 “나이가 들수록 학식이 부족한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신해혁명은 성공했지만, 혁명당은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아직도 실패와 성공, 한가한 것과 바쁜 것이 뭐가 다른지 모른다. 인간 세상은 뭐가 뭔지 모를 것 투성이라는 것 외에는 딱히 할말이 없다. 세상을 헛산 것 같다.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한심할 뿐”이라며 가슴을 쳤다.


주위 사람들은 기겁했다. “둥비우는 청말(淸末) 수재(秀才) 출신에 해외 유학까지 마친 사람이다.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 맨 앞에 서기를 피한 적 없는 노인이다.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으면 저런 말이 나올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둥비우도 지독한 독서가였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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