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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征 때도 책 안 놓은 둥비우 여전사들에게 고전·시 읽어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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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28면

1 한 화가가 독서에 열중하는 둥비우의 모습을 화선지에 담았다.

둥비우(董必武·동필무)는 다른 혁명가들과 달랐다. 청년시절, 누구의 가르침이나 영향을 받은 적이 없었다. 둥비우보다 한발 늦게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은 관핍민반(官逼民反·관이 핍박하면 백성은 반항한다)이 대부분이었다. 하루 세끼, 제대로 먹어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둥비우의 아버지는 잡화상을 운영했다.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애들 밥은 굶기지 않았다. 책만 보는 아들을 나무라지도 않았다. 둥비우는 돈만 생기면 책방으로 달려갔다.


둥비우의 고향 인근에 서양 선교사들이 많았다. 돈 벌러 온 건지, 선교하러 온 건지 분간이 안 갔다. 아편 재배, 부녀자 희롱, 인력 착취 등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골라 가면서 해댔다. 행패가 악질 지주보다 더했다.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떼로 몰려가 교회를 불사르고 선교사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안겼다.


외국 선교사들의 거주지와 교회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지방 관헌들이 진압에 나섰다. 가혹하기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청년 둥비우는 분개했다. “제 나라 국민을 감쌀 줄 모르는 정부, 다시는 믿지 않겠다.”


류진안(劉晉安·유진안. 훗날 옥사했다)이라는 사람이 동네 빈 창고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책을 쌓아놓고 아무나 와서 읽게 했다. 본인은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둥비우에게는 지상 낙원이었다. 개혁가 량치차오(梁啓超·양계초)의 책을 읽으며 흥분했다. 흥분이 실망으로 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혁명가 쑨원(孫文·손문)의 이론과 접촉했다. 쑨원이 이끌던 중국혁명당에 가입했다.


쑨원은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 둥비우는 일본 유학을 떠났다. 접촉하면 할수록, 쑨원은 한계가 있었다. 일본 친구 통해 마르크스라는 사람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이론도 이론이지만 실천이 본받을 만하다.”


『자본론』을 읽어보니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고 또 읽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도 밤새워 읽었다. 마르크스에게 더 호감이 갔다. 그럴만한 나이였다. 훗날 둥비우의 아들은 한마디로 정의했다. “아버지의 청년시절은 불만투성이였다. 독서를 통해 갈 길을 찾은, 자각한 혁명가였다.”

2 옌안 5로(延安五老)는 한 자리에 모일 기회가 거의 없었다. 화가 우산밍(吳山明)이 이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자료 제공 김명호]

1921년 여름, 중공 1차 대회에 참석했을 때도 둥비우의 짐 보따리가 제일 컸다. 갈아 입을 옷이나 생활용품은 단 한 점도 없었다. 모두 책이었다. 장정(長征) 시절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홍군 여전사의 회고를 소개한다.


“장정 초기, 둥비우는 건강이 안 좋았다. 그래도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30여명의 여전사들에게 틈만 나면 중국 고전과 서구의 아름다운 서정시를 읽어주곤 했다. 그렇게 소탈할 수가 없었다. 말이 떨어질 때마다 우리는 입을 헤 벌렸다. 좋은 책 많이 읽으면 그렇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책 많이 읽은 사람 중에 나쁜 사람도 많다며 고개를 저었다. 실천이 제일 중요하다며 웃었다.”


둥비우는 고문(古文)과 시(詩)에 능했다. 오랜 유학 생활을 통해 영어와 일본어, 러시아어도 자유롭게 구사했다. 법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UN) 창설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중국도 대표 다섯 명을 파견했다. 한 명을 공산당 몫으로 배정했다. 국제 무대에 널리 알려진 대표단원들은 둥비우를 ‘와인도 마실 줄 모르고, 포크와 나이프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저속한 농민 반역자 정도로 여겼다. 착각은 잠시였다. 미국까지 가는 도중에 “중공에도 저런 지식인이 있는 줄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미국에 도착한 둥비우는 화교와 언론인, 조야인사들을 폭넓게 만났다. 중공 활동지역(해방구)의 상황과 영향력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유엔 헌장에도 직접 서명했다. 75년 둥비우가 사망했다. 유엔 사무총장 발트하임이 조전(弔電)을 보냈다. “유엔 창설자 중 한 사람”이라는 구절을 빠뜨리지 않았다.


셰줴짜이(謝覺哉·사각재)도 평생을 독서와 사색으로 일관했다. 60세 생일날 둥비우가 보낸 축시에 “그간 쌓인 문장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는 구절을 발견하자 화들짝 놀랐다. 즉석에서 답신을 보냈다. 독서 경험을 토로했다. “과찬이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두렵다. 사람은 끊임없이 전진해야 한다. 어제와 오늘이 달라야 한다. 간밤에 읽은 것이 날만 새면 쓸모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오늘 읽으며 무릎을 친 내용도 내일이면 의심을 품어야 정상이다.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낙오자가 된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독서인은 겸손해야 한다. 건성으로 아는 사람일수록 아는 척하기를 좋아한다. 독서는 공격적이어야 한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반복해 읽고 사색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명확하지 않았던 것도 명확해 지고, 책 내용 중에 뭐가 잘못 됐는지를 식별할 수 있다.”


독서의 좋은 점도 지적했다. “머리는 쓰면 쓸수록 잘 돌아간다. 쓰지 않으면 둔해지게 마련이다. 특히 노인들은 머리 쓸 일이 없다 보니 쉽게 치매에 걸린다.” 5로(五老)는 노인이 돼서도 노인 취급을 받지 않았다. 비결은 독서였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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