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참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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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국사편찬위원회가 요즘 조선 왕조의 사고운영 실태를 조사하고 있다.
그 조사과정에서 사고 참봉의 후손이 나오고 그 집에 전래하는 교지 8첩도 찾아냈다.
그 기록에 따라 경북 봉화군의 태백산 사고엔 참봉2명, 총섭 1명, 수유 1명등의 관원과 수호군 60명, 승군 20명이 배치되었던 것도 알려졌다.
사고는 나라의 역사기록을 보관하는 곳이다. 그곳을 이처럼 엄정하게 수호했다는게 인상적이다.
1908년 일제 통감부가 전국의 사고에 있는 실록과 전적들을 규장각에 이관하려 했을 때 이들 수호군은 통감부의 조처에 항거하여 더러 실록을 빼내 숨겼다가 일본 관헌에 끌러가 매를 맞기도 했다.
임신왜란의 전화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주사고의 「실록」을 옮겨 간직했던 선비들도 있었다.
태인의 산속에 살던 포의서생 안의와 손홍록은 1백여 장정을 동원해 사대사고중 유일하게남아있던 전주사고의 실록과 전적들을 소 50마리에 싣고 강화를 거쳐 묘향산 보현사까지 옮겼다.
『조선왕조실록』이 오늘날까지 온전히 알려지게된 것은 오로지 이들 절의의 선비들로해서다.
고려 인종때 일어난 이자겸의 난중에서 대부분의 전적이 소실되었으나 사관 김수웅은 국사를 등에지고 옮겨 땅에 묻어 보전한 바도있다. 우리의 역사나 문적은 그런 선인들의 노력으로 보전됐다. 뛰어난 군왕이 있을때 문흥이 제도화 된 것은 더 말할게 없다.
역사상 고려의 성종은 문화주의의 선각자로 기록된다. 그는 서경에 수서원을 두어 거란군의 침입으로 소각되거나 흙탕에 파기된 문적들을 복사해 보충했다. 「심은사는 2만여권을 비서성에서 사하고, 장순은 30 거서를 호관에 진장」했던 것이다.
그를 이어 고려의 숙종은 경적에 「고려국어장서」란 도장을 찍어 보관하기 시작했다.
조선 성종때 양성지가 나라의 문화발전을 위해 「고려의 그 제도를 이어」 홍문관을 설치하라고 상주한 것도 뜻깊다.
그 홍문관의 응교였던 정석견이 다른 관사의 구사를 빌어 거느리는 통례를 깨고 혼자 구종만 데리고 대궐을 출입할 때 사람들이 조소하자 『차라리 산자관원이 있었으면 되었지 구사빌리는 건 원치 않는다』고 청빈을 내세운 일도 있다.
홍문관이 언론·문필기관이며 청직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종사자가 정의와 헌신을 목표로 외톨로 행세했다는게 유난히 돋보인다.
나라의 문화유산과 겨레의 옹골찬 정신을 힘들여 지킨 선인들의 뜻이 지금 새삼 되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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