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0)|<제82화 출판의 길 40년>(3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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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조선인이 경영하던 인쇄소에 비하면 일본인의 인쇄소는 그 시설규모가 월등했다. 왜냐하면 조선인이 경영하는 업체가 사양화해 가는 한글·한자 혼용의 인쇄물을 맡는 일이 고작인데 비해 일본인은 기고만장한 조선총독부의 관수용 일감과 교과서·관보등 대량인쇄의 일감을 도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들 가운데 몇몇 규모 큰 인쇄소의 내력을 알아보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는 1만9천4백58평의 부지에 건평이 1천7백74평이나 되는 지금 생각해도 감탄할 대규모 인쇄소였다. 위치는 현 원효로1가로서 원래는 대한제국의 전원국인쇄소가 있었던 곳.
한일합방 후에는 얼마동안 조선총독부 관방인쇄국으로 행세하다가 그 후 일본인에게 불하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 인쇄소가 주식체로 정식 발족된 때는 1923년이며, 조선의 청소년들을 일본인으로 개조하기 위한 초등학교용 교과서 발행이 그 설립의 목적이었다. 그밖에도 조선은행권, 기타 유가증권· 관보 등을 인쇄했다. 활판기 10여대와 2색도 오프세트기를 갖추었으며, 정사로 책을 꿰매는 자동제책기까지 들여놓고 하루에 3백연 (1연은 전지 5백장을 말함) 정도를 인쇄해냈다고 한다. 공장의 종업원 수는 6백50여명.
다음으로 조선인쇄주식회사는 1904년, 그러니까 한일합방 되기 이전에 생긴 일한원서주식회사가 그 전신이다. 설립 당시의 장소는 서소문동이었는데, 두차례의 화재를 당하고 지금의 만리동1가 62번지 (현 광명인쇄공사) 에 정착하여 해방을 맞는다. 당시 그 공장에서 일했던 제책공의 증언에 따르면 여기서는 주로 조선총독부의 관수물인 서적·법령집·초등학교용 방학책, 그리고 일반출판사의 월간지들을 많이 인쇄했다고 한다.
종업원은 인쇄부에 4백명, 제본부에 1백명 정도였다. 이 공장에 사진제판시설을 들여왔는데, 무슨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관계자 외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밖에 일본인 업체로 컸던 것은 근택인쇄소 (당시 장곡천정·현소공동 미도파뒤) ,대해당인쇄소(현 서울시청앞) , 곡강인쇄소(현충무로4가 아테네극장자리) ,대총인쇄소 (현 을지로2가), 조선단식인쇄, 조선교학원서인쇄부등이 있었다. 그라비야·콜로타이프 사진제판등을 갖추어 그것들은 시설의 질면에서 별차이가 없는 규모들이었다.
이 일본인의 인쇄시설들은 8·15해방과 더불어 미군정에 의해 귀환재산으로 접수되었는데, 그 후의 사정을 알아보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는 해방이 되자 한때 방태영에게로 넘어갔다가 최장수에게 인계되었고, 그 후 다시 조진주 (전 선광인쇄 전무) 에게 넘어갔다. 그런 다음 사학재단이 운영하던 문교서적주식회사(대표 김영주) 에 인계되어 한국인쇄주식회사로 개편, 발족한다.
다음으로 조선인쇄주식회사는 맨 먼저 감리교목사인 유찬기에 의해 운영되더니 곧 대한인쇄공사로 바뀌고 정부 직영 공보처 관리공장이 되었다. 이 공장에서는 해방 후에도 계속해서 관보등 정부의 인쇄물을 찍었다. 이 공장은 1956년2월 민간에 불하되어 소인호· 신성생에게 낙찰되었다. 그러다가 5·l6혁명직후에는 고려서적주식회사 (대표 이학수) 에 매각된다.
근택인쇄소는 종업원들의 손으로 넘어가 조선정판사로 변신했는데, 이곳에서 좌익계에 의한 위조지폐사건이 일어난다. 그 후 이 공장은 경향신문사가 인수했다.
대총인쇄소는 홍찬의 평화신문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대한일보가 맡았다. 대해당인쇄소는 종업원들이 공동인수하여 고려문화사로 개편됐다.곡강인쇄소는,대한교육연합회의 직영공장이 되었다가 대한교과서주식회사 (대표 김광수)가 매수한다. 조선교학원서주식회사는 최상윤에게 인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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