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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청와대·내각에 프로들이 넘쳐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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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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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그의 애칭은 ‘토니’. 독일 프랑크푸르트 축구팀의 장비 담당이다. 사실상 온갖 허드렛일이 그의 몫이다. 선수들이 로커룸 바닥에 땀과 흙투성이 유니폼을 내동댕이치면 그것들을 집어 들고 깨끗이 세탁했다. 한국 촌뜨기 선수가 아버지뻘인 그가 안쓰러워 한쪽에 자신의 유니폼을 가지런히 챙겨두면 토니는 “그런 데 신경 쓰지 말라”며 “이것은 내 일!”이라 단호히 말렸다.

선수들의 축구화에 뽕을 박거나 밑창을 깔고, 스타킹을 챙기는 것도 토니의 몫이었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그는 일찍 운동장에 나가 땅을 만져보고 잔디 상태를 일일이 확인했다. 각 선수에게 맞는 최선의 축구화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한국 촌뜨기 선수에겐 항상 그가 좋아하는 약간 헌 축구화에 헐렁한 스타킹을 건네주었다. 비 오는 날 선수가 자꾸 그라운드에 미끄러지면 토니는 자신의 잘못인 양 억울해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30명의 감독이 거쳐 갈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몇 해 전 차범근 선수가 칼럼에서 소개한 35년 전 토니의 이야기다. 그는 “토니야말로 프로 축구팀의 진정한 프로였다”고 기억했다. 프랑크푸르트팀은 은퇴한 토니에게 불멸의 축구 스타들과 똑같이 대접한다고 한다. 하루 저녁 100만원인 축구장 VIP라운지 회원권까지 주면서….  

차범근의 토니 이야기를 새삼 꺼낸 것은 4·13 총선의 미흡한 뒤처리 때문이다. 집권여당이 참패한 지 열흘이 지났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민의를 겸허히 받들어 민생을 국정 최우선으로 삼겠다”는 발언뿐이다. 가장 납득이 안 되는 대목은 내각이나 청와대 비서실이 총사퇴할 조짐조차 없다는 점이다. 총선 참패, 그것도 집권당의 1당 자리마저 붕괴된 것보다 더 중요한 총사퇴 이유가 있을까. 혹 세월호 사태 때 국무회의에서 “내각이 총사퇴하자”고 했다가 러시아 출장 중에 혼자 ‘외교전문’을 통해 잘렸던 유진룡 전 문화부 장관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기 때문일까.  

청와대 주변에선 “일단 새누리당부터 지켜봐야 한다. 우리가 먼저 움직이면 총선에 개입했다는 의심을 자초한다” “내각 개편도 여소야대의 인사청문회를 돌파할 자신이 없다”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총선에 참패한 내각과 청와대 비서진은 절대 갈아 치울 수 없다. 마르고 닳도록 유임시키겠다는 소리다. 하지만 진짜 프로 내각과 참모라면 이런 때야말로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제대로 진정한 충성심을 발휘해야 한다.

박 대통령은 ‘의리’와 ‘진실한 사람’을 잘못 분류하는 것 같다. ‘배신자’로 찍힌 유승민 의원이나 유진룡 전 장관이 오히려 진실하고 의리 있는 사람인지 모른다. 좋은 보좌진은 자신이 모시는 지도자에게 아무리 어려워도 진실과 사실을 제대로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정치 생명을 걸고 반대할 건 반대해야 한다. 사실 반대는 충성심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앞에선 열심히 수첩에 적고, 뒤로 호박씨를 까는 ‘무늬만 진박’이 더 위험인물이다. 이는 반대가 아니라 배반이다.

아직도 내각과 청와대의 총사퇴 조짐이 없다는 건 불길한 징조다. 박 대통령 주변에 의리 있고 진실한 인물들이 멸종됐음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이런 때야말로 과감한 인적 쇄신이 절실하다. 독일의 토니처럼 제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프로 장관, 프로 비서관이 보고 싶기 때문이다. 가끔은 청와대와 내각에서 “이건 아닙니다”는 반대 목소리가 흘러나와야 한다.

사실 반대는 신뢰에서 비롯되는 행동이다. 반대를 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상대방에게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른 채 외면하는 게 편하다. 또한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반대에 기초한 정치체제다. 4·13 총선 참패도 박 대통령이 주변의 진실 어린 반대의 싹을 싹둑 자르는 바람에 국민적 반대에 부닥친 것인지 모른다.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위대한 지도자는 진실 어린 반대와 적대적인 공격을 혼동해선 안 된다”고 했다. 박 대통령부터 변해야 한다. 권위주의 이미지를 민주적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청와대와 내각에 진짜 프로들이 모여든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