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랑 “판소리·가야금서 K-팝 열기 예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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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재임 중 예술창작 장려와 문화 소외해소를 추구했다. “미테랑 대통령의 지지 덕분”이라고 말했다. [사진 최민우 기자]

“한국에 갔을 때 국악예술학교에 간 적이 있다. 판소리·가야금 등 전통 음악이 인상적이었다. 현재 K-팝 열기의 근원을 감지했다.”

오묘·애절한 선율 지금도 못 잊어
김기영 감독 영화 ‘하녀’도 인상적
오랜 역사 이어온 한국전통에 꽂혀

프랑스 전 문화부 장관 자크 랑(77). 그는 단순한 문화 관료가 아니다. 1980년대 미테랑 정부에서 10년간 문화부 장관을 지내며 그가 역설한 문화적 예외, 즉 “문화는 교역의 대상이 아니라 교류의 대상”이라는 주장은 미국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유효한 전략이었다.

한국 영화의 스크린쿼터제 역시 ‘문화적 예외’에 기초하고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예술인 안전망(Intermittent), 지역별 문화격차 해소, 예술 교육 강화, 도서정가제 실시, 음악·영화 축제 출범 등 그가 재임중 관철시킨 제도들은 그야말로 20세기 문화정책의 결정판이었다. “프랑스를 예술의 나라로 다시 부흥시킨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자크 랑을 향한 찬사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는 또한 2009년 외규장각 의궤 반환의 일등 공신이었다. 대북 특사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최근엔 한국계로 유명한 플뢰르 펠르랭 문화부 장관의 경질을 비판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한불 수교 130주년 및 한불 상호교류의 해를 맞아 문화정책의 대부이자 프랑스 내 대표적 지한파인 자크 랑과 지난 15일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근황이 궁금하다.
“2013년부터 아랍세계연구소(Institut du Monde Arabe) 소장을 맡고 있다. 연구소는 1987년 출범했는데, 당시 나는 문화부 장관으로 건축가 장 누벨을 선정해 연구소가 건립되는 것을 적극 지원했다. 취임 이후 ‘메카 성지순례’ ‘고대 이집트의 보물’ 등 다양한 전시회를 열었다. 지난해 방문객은 100만 명을 넘었다. 소장 취임 전보다 2배 이상 늘었다. 지난해 11월 발발한 파리 테러는 테러에 대한 무관용만큼, 아랍 세계에 대한 근본적 이해를 갈구하게 만들고 있다. 아랍 문화에 대한 편견과 무지를 깨고 싶다.”
지난 2월 펠르랭 문화부 장관의 경질을 강도있게 비난했는데
“정치적 이유때문이 아니라 절차상 문제를 제기한 거다. 펠르랭은 열정적으로 현 정부를 위해 일해왔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예의가 있어야 한다. 사퇴 통보를 막바지에 한 건 비인간적 처사다. 현 올랑드 정부는 좀 더 열정과 야망을 갖고 문화정책을 시행했으면 좋겠다.”

| 스마트폰에 문화세 부과 적극 찬성
글로벌 디지털 기업의 수익 일부
해당국 문화진흥에 쓰이도록 해야

자크 랑하면 ‘문화적 예외’를 빼놓을 수 없다. 현재도 유효하다고 보는가. 자칫 문화 국수주의로 변질될 우려는 없을까.
“정신적 활동과 상품은 다르다. 기발하고 독특한 예술을 ‘작품’이라 명명하는 이유 아닌가. 재현하기 어렵고 깨지기 쉬운 존재이기에 보호되어야 한다. 따라서 문화의 본질적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 이상 ‘문화적 예외’ 역시 변해선 안 된다. 오히려 디지털 분야로 더 확장해야 한다. 최근 프랑스 정부가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기에 1∼4%의 ‘문화세’를 부과한다는 방침인데, 적극 찬성이다. 구글·애플 등 글로벌 온라인 사업자들은 자신들이 벌어들인 이익의 일부를 각 나라의 문화 진흥에 쓰이도록 적극 협조해야 한다.”
2009년 외규장각 도서 반환의 숨은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해 대북 특사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다. 외규장각 도서는 19세기말 프랑스가 훔쳐온 것이며, 그걸 보관하는 건 불법이며 부당한 일이다. 그래서 1980년대부터 정부를 적극적으로 설득했고 사르코지 정부때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2009년 내가 북한에 간 이유는 당시 프랑스가 EU 회원국중 북한을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연락사무소 설치여부가 당시 현안이었다. 현재 경색된 남북관계의 가장 큰 원인은 북한 핵이다. 국제적 해법이 필요하다.”
프랑스 내 한국문화 인기가 높다고 하는데
“프랑스에서 홍상수·김기덕으로 대표되는 한국 영화에 대한 애정은 이미 10년을 훌쩍 넘겼다. 개인적으론 1960년작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최근엔 K-팝은 물론 한국 문학·음식·패션 등 다양한 분야로 프랑스인의 시선이 넓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오랜 역사를 통해 이어져 온 한국 전통에 꽂혀있다. 7년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국악예술학교를 가 보았는데, 그때 들었던 오묘하고 애절하고 응축된 선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최근 유럽에 불고 있는 한국 전통 예술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일회성 호기심이 아니다.”

파리=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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