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北核, 러시아 역할 긴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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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무현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러시아를 제외한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 설정과 북핵 해결 협력 외교가 일단락되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번영'보다 '평화'를 우선적으로 확립하기 위하여 북핵 문제와 남북 경협의 연계를 시사함으로써 남.북.미 3자관계를 보다 명확히 규정하였고, 일본과는 북한이 핵 문제 해결에 성의를 보일 경우 공동으로 경제지원에 나설 것임을 합의하였다.

또한 중국이 북한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다자회담'이라는 표현 대신 '당사자 간 대화'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전반적으로 중국의 적극적인 중재의지와 한.중 간 대북 전략이 상당부분 일치함을 확인하였다.

한편 북한은 11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북측 대표가 주장했듯이 핵 문제에 대하여 어떤 외세와도 대화를 할 수 있고 미국이 체제만 보장해 주면 핵을 포기할 것이며 민족공조를 통해 미국에 대항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다분히 위선적이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사실상 한국.중국.러시아가 미국으로부터 체제 안보를 보장해 줄 것인데도 미국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은 결국 민족의 안위와 한반도 평화를 담보로 위험하고 무모한 도박을 벌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남북 대화 채널을 총동원하여, 북한이 양보하면 체제보장과 경제지원까지 받을 수 있으나, 자존심 경쟁을 지속할 경우 미국의 가혹한 제재가 있을 것이고, 우리 역시 이에 가담할 수밖에 없음을 명확히 설명하여, 북한이 우리를 지렛대 삼아 벼랑끝 전술을 지속한다는 오해를 불식하고, 양보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설득하는 데 우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북한이 다자회담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사이에 국제사회에서 북한에 대한 여론과 분위기가 악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특히 9일 호주 브리즈번에서 개최된 북한의 마약 및 무기 밀매 차단방안 논의를 시작으로 미국과 일본은 프랑스.독일 등 그동안 북한에 대해 상대적으로 유화적이었던 유럽의 국가들까지 압박공조의 장으로 초대하고 있다.

때문에 북한이 이런 상황을 정확히 읽어 국제사회의 여론이 아직 북한에 완전히 적대적이지 않을 때 대화와 협상의 틀에 나와야 한다.

미국과 북한이 서로 상대방의 입장 변화를 기다리지만 한반도 정세 불안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우리는 미국의 태도 변화만 기다릴 수는 없다. 우리 나름의 해법으로 어떻게든 현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북.미 양국의 체면을 유지해 주면서 양국 간 실추된 신뢰를 회복시키거나 적어도 부족한 신뢰를 보완해 주어야 한다. 일본은 미국 추종 외교를 펼치고 있고 북한이 민족적 반감을 가지고 있으므로 중재에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과 러시아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 특히 중국이 북한에 에너지와 식량의 상당량을 지원해 주고 있기 때문에 미 행정부가 중국이 북한에 핵 포기 및 다자회담 수락 압력을 행사하도록 요구하고 있듯이, 우리 정부도 중국의 적극적인 중재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대북 영향력은 과장된 듯하다. 중국이 북한에 대한 미국의 무력 제재를 억지하는 역할은 확실히 수행할 수 있으나 북한에 특정 행위를 취하도록 압박할 능력이나 의지는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동시에 러시아의 적극적인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 북한의 수십년간의 핵 개발은 러시아와의 협력으로 이루어졌고, 북.러 양국은 최근 3년간 매년 정상회담을 개최해 왔으며 북핵 위기가 북한의 전력난에서 비롯된 것과 관련하여 러시아가 연해주에 핵발전소를 건설, 북한에 전력을 지원할 계획을 추진 중일 뿐 아니라 최근 러시아의 대북 에너지 지원이 급증하였고 양국 간 송전망을 정비하고 있다.

또한 핵 위기 해결을 위하여 북한에 특사까지 파견하는 성의를 보인 것도 러시아다. 따라서 러시아가 한반도 핵 문제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고, 가능하다면 하바로프스크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북.러 3국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홍현익 세종硏 안보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