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월』도 지켜본 흑백의 장고|중앙일보 「왕위전」결정국을 관전하고…김성동씨<작가·아마3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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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세상과 마찬가지로 반상은 바다. 기사층이 얕은 한국기고해인지도 모른다. 괴로움의 단의 황야를 질주하는 두마리의 고독한 표범인 서훈현과 서봉수에 이르러서는 더구나 그러할 것이다. 타이틀을 지켜야 하는 불안과 빼앗아야하는 고달픔. 싸워 이긴자만이 살아남을수 있는 적자생존의 비정한 법칙.
두 사람의 바둑을 구경가는 필자의 기분은 그러나 즐겁다. 칼과 칼이 숨겨진 벚꽃이 만발한 이 봄날에 바둑을 둘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은 행복일 수 있을 것이므로 서로가 공평하게 한수씩 두어서 집이 많은 편이 이기게 되어 있으며, 그리고 이겼다고 해서 오만하지 않고 졌다고 해서 비굴하지 않는 가장 민주주의적인 놀이임에랴.
반가부좌의 자세로 단정히 앉아 있던 도전자가 고개를 숙이자 상석의 「왕위」가 마주 고개를 숙인다. 기록계가 초시계를 눌렀고 왕위와 도전자가 동시에 바둑통의 뚜껑을 연다. 정각 10시.
「왕위」의 자리를 놓고 7번 승부의 긴 여로를 달려온 두 사람은 말이 없다. 말없이 판만 바라본다.
첫점이 떨어진것은 정확하게 5분뒤였다. 오른쪽 위 귀퉁이 화점. 잠시후 왕위가 자기편 오른쪽 귀퉁이의 소목에 두었고, 다시 5분뒤에 도전자가 세번째의 수를두었다. 다섯번째 수에 12분, 일곱번째 수에 18분.
오늘따라 서봉수8단의 운석은 신중하다. 중할 수 밖에 없다. 약관 20세의 초단으로 장로 조남철8단(당시)을 물리치고 「명인」이 됨으로써 세상을 경악시켰고, 바둑기사가 1면톱으로 실리는 한국신문사상 초유의 기록을 남긴 「무사독학의 야생마」. 「야생의 귀재」조훈현과 함께 이른바 「조서시대」를 구가하여 왔고 구가하고 있는서봉수는,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는 무관이다.
서8단이 한쪽 무릎을 세운다. 세운 무릎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턱을 받친다. 손을 뗀다. 무릎을 바꿔 세운다. 세운 무릎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다시 턱을 받친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없는 혼잣소리를 중얼거린다. 무릎을 바로 하여 반가부좌를 튼다. 보리차를 마신다. 담배를 입에 문다. 고개를 흔든다. 허공을 바라본다.
다시 판을 바라보며 뭐라고 중얼거린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끝났나?」 361노의 바둑판위에는 그러나 이제 겨우 30여개의 돌들이 놓여있을 뿐이다. 포석단계인 것이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도 서8단은 좀처럼 돌을 잡지 않는다. 흑37의 수가 두어진 것은 1시간 15분 뒤였다.
이번에는 조9단의 장고가 계속된다. 가느다란 장미담배가 계속해서 타들어 간다. 식은 보리차 잔을 뒤집는 속도가 빨라진다. 뭐라고 혼잣소리를 중얼거린다.
가만히 들어보니, 「망했구나」.
조9단이 기보에 표시를 하여 기록계에게 넘겨 줬는데, 점심을 위한 봉수였다. 꼭 1시간만이었다.
근처의 한식집에서 된장찌개로 밥을 먹으면서 바둑얘기는 일절 없다. 관전기를 쓰는 김수영6단에게서 들은 얘긴데 서8단은 어젯밤을 대국장인 운당여관에서 잤다고한다. 『차가 막허서 늦을까봐』라고 말하며 웃었지만 이 바둑에 임하는 그의 결연한자세를 보는 것 같다.
2시부터 다시 대국이 계속되었다. 백이 한점 놓으면 백이 좋아 보이고 흑이 한점놓으면 흑이 좋아 보인다.
아마추어의 눈으로는 도무지 형세를 짐작하기 어려운데, 검토실에는 기사들이 보이지않는다.
물만두로 간단히 저녁을 때우며 대국은 계속된다. 이른바 눈터지는 계가바둑. 7시.
벚꽃이 활짝 핀 뜰에는 어둠이 내린다. 정적 이따금 들려오는 바둑돌 소리로 해서 수묵 산수화 몇폭이 걸려 있는 대국장은 더욱 고요한 느낌인데, 담밖으로부터 이상한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려왔고, 그리고 사람의 소리였다. 최루탄에 쫓겨가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린가 하고 귀를 기울였는데, 무엇인가를 팔러 다니는 행상의 외침소리였다. 담밖의 소리와는 관계없이 두사람은 묵묵히 돌을 놓아간다.
8시쯤 「세력바둑의 대가」로 알려진 강철민6단이 들어왔는데, 이 바둑을 관전한 유일한 기사였다.
「반 짐인가?」라고 중얼거리며 서8단이 공배를 메웠다. 조9단이 묵묵히 마지막공배 자리에 백돌을 놓았다.
봄밤이 깊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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