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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물림하는 가난] "정부 돈 받고 사는 게 편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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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9일 서울 아현동 삼성아파트 인근 상가의 1층에 위치한 떡집 '오곡나눔'.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인절미.꿀떡 등을 만드는 손길이 분주하다. 이 떡집은 극빈층이 빈곤에서 벗어나도록 정부가 운영비를 지원해주는 자활 사업장이다.

金모(43.여.서울 마포구)씨는 이곳에서 떡 만드는 기술을 배워 한달에 60만~80만원을 번다. 월소득이 최저 생계비(5인 가족 기준 1백16만원)에도 못미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분류됐다.

정부에서 주는 생계비.장애수당 등을 합치면 월 수입은 1백만원. 이 돈으로 다섯 식구가 먹고 산다. 남편은 수입이 없는 장애인, 큰딸(22)은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관계 당국은 金씨가 빈곤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취재팀에 추천했다.

하지만 본인의 생각은 사뭇 달랐다. 그는 "수급자에서 벗어나면 의료비 등에 돈이 더 들기 때문에 이대로 수급자로 남아 있고 싶다"고 말했다.

극빈층의 빈곤 탈출은 이룰 수 없는 꿈인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현행 기초생활보장 제도가 오히려 탈(脫)빈곤을 가로막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부 극빈층에서 벌써부터 복지 제도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엿보인다.

본지와 사회보장학회(회장 이규식 연세대 교수)가 삼성생명의 후원으로 서울 시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4백20명을 조사한 결과 3백17명(75%)은 수급자에서 벗어나길 원치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자리가 생기면 수급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사람은 64명(15.2%)에 불과했다.

이들이 국가 지원에 안주하려는 이유는 허술한 제도 때문이다. 수급자에서 제외되면 생계비만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의료비.장애수당.장애아 보육수당.영구임대주택 입주자격 등의 각종 혜택이 사라진다.

또 최저생계비에서 수급자가 번 소득을 뺀 차액을 정부에서 생계비로 채워주기 때문에 소득액에 관계없이 받는 돈은 같다. 열심히 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는 '빈곤의 덫'에 이미 걸려 있다. 본지 조사에서 93명(22.1%)은 "(빈곤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며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었다.

보건사회연구원 노대명 박사는 "수급자에서 제외된 뒤에도 일정 기간 의료비나 주거 지원을 계속하고 열심히 일할수록 많이 가져갈 수 있는 유인책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초생활보장제 중 탈빈곤 장치는 자활사업이다. 지난 3월 말 현재 수급자 1백35만명 중 4만6천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근로 의지를 불어넣고 기술을 가르치거나 일자리를 알선해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는 제도다. 생산적 복지의 '생산'에 해당된다.

지난해 5천여명이 자활을 통해 수급자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복지부 관계자는 "대부분은 수급자보다 형편이 약간 나은 차(次)상위 계층에 머물고 있어 탈빈곤에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또 상당수는 일용직.임시직으로 일하다 일자리가 없어지면 다시 수급자로 돌아간다.

성공회대 이영환 교수는 "자활 대상자들의 상당수가 크고 작은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경쟁하기 힘들다"면서 "노동 강도가 약한 일자리를 많이 만들거나 창업을 유도해 제품 판로를 개척하는 등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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