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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대머리를 포기하고 스스로 빡빡머리가 된 사진작가 윤광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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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달 전이었다.
재미있는 사진을 문자로 받았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의 저자인 김정운 작가가 보낸 것이었다.
사진을 본 순간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머리카락 없는 중년 남자의 머리만 찍힌 사진, 마치 화투의 팔광그림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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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정운]

이윽고 사진에 대한 설명이 문자로 왔다.
‘비행기 뒷좌석에서 본 윤광준 머리’

그리고 사나흘 후, 윤광준 사진작가가 스스로 페이스북에 그 사진을 공개했다.
더구나 보란 듯이 그는 그것을 프로필 사진으로 내세웠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감추게 마련 일 터인데 당당하게 공개한 게 놀라웠다.

그 사진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뜨거웠다.
심지어 누군가는 ‘세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포트레이트중의 하나’라고 댓글을 달았다.
누구나 감추고 싶어하는 것을 당당히 공개한 윤광준 사진작가,
그의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머리를 강조한 사진이 찍고 싶어진 게다.

그는 오래전부터 ‘글 쓰는 사진가’로 알려져 왔다.
그가 낸 사진 관련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게 다수였다.
사실 사진 관련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각종 매체에 오디오, 생활명품 관련 칼럼을 연재하며 필명을 떨쳐왔다.
십 수년 전부터 그의 책과 칼럼을 즐겨 본 터라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통해 만날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그의 전시 소식이 들려왔다.
보도자료엔 13년 만의 전시라고 되어 있었다.
전시 제목은 [달아난 시간의 발라드]라고 했다.
사진 찍을 기회를 찾고 있던 터니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오픈 행사가 있던 지난 7일, 장비를 챙겨 전시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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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윤광준]

전시장은 인산인해였다.
사진 전시장에 뭔 사람이 그리 많은지 그를 만나기조차 쉽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사진 찍는 것은 고사하고 인사 나누기조차 여의치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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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윤광준]

먼저 전시된 사진부터 둘러봤다.
그의 사진, 기억 속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어쩌면 내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이웃의 이야기였다.
기억 속에 존재했으나 잊고 있었던 우리 삶이 거기 있었다.

그의 작가 노트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기억은 뒷걸음치고 시간만 앞으로 달아난다.
둘의 격차는 점점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한 번쯤은 멈춰서 뒤를 돌아다보아야 한다.
지나간 시간을 딛고 선 지금이 더 소중해진 탓이다.
어제는 오늘이 되고 오늘은 내일을 연다.’

전시된 사진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 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 버린 시간,
그만큼 뒷걸음 친 기억들,
전시된 그의 사진들은 그 간극을 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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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윤광준]

사진을 꼼꼼히 다 둘러봤는데도 그의 사람맞이는 끝날 기미가 없었다.
두어 시간 이상을 족히 기다렸건만 사진을 찍자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하는 수없이 내일 다시 오겠노라 약속을 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 다음날, 만나자마자 ‘팔광 사진’ 이야기부터 꺼냈다.
“김정운 작가가 그 사진을 왜 공개하지 않느냐고 하도 윽박질러서 어쩔 수 없이….”라며 파안대소했다.
“자발적이 아니고 강압에 의해서 라구요?”
“어차피 내 스스로 공개한 것이니 자발적이라고 봐야죠. 재미있기도 하고….”
“미리 거울을 하나 준비해 왔는데요. 거울을 보며 사진 한 장 찍으시죠?”

머리와 얼굴을 함께 찍으려는 의도였다.
그 또한 사진작가이니 거울의 의미를 금세 알아채고 박장대소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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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과 배경을 준비한 후 질문을 던졌다.
“머리는 언제부터 빡빡 밀었습니까?”
“1997년 회사를 그만두고 어떤 계기가 필요할 무렵이었어요. 앞에 있는 저 친구처럼 얼마 남지 않은 머리로 버티고 있었죠.”

그가 가리킨 사람은 마침 전시장을 찾은 그의 후배였다.
그가 말한 것처럼 그 후배는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고수하고 있었다.
내심 거울을 들어달라고 부탁하려던 참이었는데 그의 후배라고 하니 더할 나위 없었다.

“그때 무용가 안은미가 한 마디 하더라구요. 얼마 남지도 않은 머리카락 그리 힘들게 달고 다니지 말고 확 밀어버리라고 하데요. 가만히 내버려두면 대머리고 네 손으로 밀면 빡빡인데 왜 빡빡이를 안 하냐고 하더라구요. 그 말이 딱 와 닿았어요. 그냥 두면 타율, 깎으면 자율, 그날로 확 밀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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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를 포기하고 스스로 깎은 머리, 이젠 그만의 강력한 캐릭터가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만천하에 ‘팔광 머리’ 사진을 공개하고, 또 그것으로 소통할 정도로 당당한 것이었다.

얼마 남지 남은 머리카락을 고수하는 후배에게 거울을 들어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사진 촬영이 시작되었다.
거울을 든 후배가 얼굴을 내밀지 않은 채 농담 투로 내게 물었다.
“혹시 제 머리까지 같이 찍는 것은 아니죠?”
“ 아! 죄송합니다. 벌써 찍었습니다. 사실 전시장에 들어오실 때부터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진을 본 윤 작가가 이럴 줄 알았다며 배를 잡고 웃었다.
그의 후배도 덩달아 웃었다.
그 사진은 그냥 내버려둔 대머리와 스스로 민 빡빡머리가 함께 찍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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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빡머리로 세상과 소통할 줄 아는 윤광준 사진작가의 전시는 이달 17일까지 이어진다.
전시 장소는 통의동 [팔레 드 서울], ’파버 카스텔’ 255주년 기념초대전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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