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공어뢰정 예인서 송환까지 백40여시간|일괄송환방침 사건첫날 결정된듯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발생 4일만에 막을 내린이번 중공어뢰정사건의 클라이맥스는 군사적으로는 중공수색군함 3척이 우리영해를 침범했던 23일상오의 4시간, 외교적으로는 홍콩주재 우리총영사관이 신화사통신으로부터 받은 사과 「서한」을 공식외교문서로, 간주할 것이냐를 놓고 심야회의를 했던 24일 하오8시부터 11시까지 3시간이었읍니다.
-이두 고비에서 한·중공양국정부가 신속한 해결이 공동이익이라는 기본인식아래·자제와 호양의 정신을 보임으로써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실종어뢰정을 실력으로 빼앗아라도 갈듯 중공함정3척이 우리영내로 깊숙이 침범해 들어오고 우리 해·공군이 출동, 무력시위를 했던 23일상오 황해엔 일촉즉발의긴장이 감돌았어요. 중공함정이 퇴거하자 우리정부의 기본대책은 1, 2차관계장관회의에서 별 논란없이 결정됐다고 해요.
-이번 사건 처리과정에서 관심의 초점은 난동을 부렸다는 두사람을 어떻게 다룰것이냐의 문제였읍니다. 이들이 단순한 범죄자냐, 반란을 성공시킨 반란자냐, 아니면 정치적 망명자로 볼것이냐의 문제였지요.
-법리적인 판단이 우선돼야겠지만 정부로서는 상대가 상대니만큼 정치적인 고려도하지 않을수 없는 입장였던것 같아요. 결과를 놓고 보면 정치적인 고려가 우선됐다는 느낌입니다.
-사건관련자들이 군인인데다 난동자 2명만 살아남은것도 아니어서 어뢰정과 승무원 전원의 일괄 송환방침은 이미 23일 하오회의에서 결정됐으리라는 관측입니다.
-한·중공간교섭중 가장 어려웠던 국면은 역시 서명자를 누구로 하느냐였지요. 중공측은 처음부터 사과내용에 대해서는 유연한 태도를 보였어요. 24일하오 우리측에 구두로 사과문을 교섭해 왔을때 이에 사과·관련자문책·재발방지 조항이 다들어 있었으니까요.
-마지노선은 역시 서명자였습니다. 중공은 서명자로 제시한 신화사통신 홍콩부지사장을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될수있는대로 국가기관의 이름을 넣지말자는 속셈이지요.
반대로 우리는 국가기관명을 꼭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통신사라 하면 일반적으로 뉴스를 제공하는 곳인데 어떻게 국가간 교섭의 서명자가 될수 있느냐는 것이었읍니다.
-이때문에 교섭이 만하루 늦어졌어요.
결국은 타협안이 나왔지요.
서명자 앞에 『중공외교부의 접권을 받아』라는 구절을 넣고 본문에도 이를 넣기로 한것이지요.
우리쪽은 이 구절이 근거가 돼 중공외교부의 사과를 받았다고 해석했고 중공측은 국가기관이 직접서명을 안했으며 체면은 살렸다고 생각한것이지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화사통신 홍콩분사가 단순한 통신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홍콩주재 중공외교대표부 구실을 하고있다는 사실이 부각됐읍니다.
이번 교섭에서 확립된 한·중공간 홍콩채널은 앞으로도 유용한 기능을 하게될것으로 기대됩니다.
-국교가 없는 두나라 사이에 이번 사건처리가 신속하고 명쾌한데 대해 외국언론들은 놀라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신문들은 발생 1보부터 일제히 1면머리기사로 이사건을 다루면서 「선상반란」을 제목으로 다루는등 한국신문들보다 사건배경등을 더욱 상세히 앞서 보도해 큰 관심을 나타냈어요.
-승무원들은 경찰등 관계당국에 의해 지나치다할정도로 보호를 받았지요. 이들이 묵고있던 군산관광호텔5층은 「출입증」「거리질서확립」이라는 비표를 단 사람만을 출입 시켰어요.
-23일밤 승무원들이 투숙할때 호텔로비에서 국내외취재진을 강제로 쫓아내기도 했던 경찰은 27일 승무원들이 호텔을 떠날때는 태도를 1백80도 바꾸었어요. 호텔1층 중앙계단에서 후문까지 두줄로 나열, 사이사이에 보도진들이 끼어 취재할수 있도록 했는데 경비책임자인 군산경찰서 보안과장은 늘어선 의무경찰에게 『TV에 나오니 늠름한 자세로 서있어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 취재진들의 실소를 자아내게 하기도했지요.
-경찰의 「엄중한 경비」망에는 허점도 많았지요. 일요일인 24일엔 중화민국대사관무관이 승무원들을 만나기위해 삼엄한 경비망속에서도 5층객실에 방을 얻었으나 이사실을 몰랐어요.
우연히 무관과 안면이 있는 한 조사관계자가 경찰에알려 부랴부랴 6층으로 객실을 옮기는 해프닝이 있었읍니다.
-승무원들이 처음 투숙했던 23일엔 이 호텔 5층에 미군 3명이 투숙중이었는데 경찰이 『다른층으로 방을 옮겨달라』고 요청하자 『미국대사를 불렀으면 옮기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실랑이를 벌이는등 과잉경비로 인한 해프닝은 많았읍니다.
-승무원들은 83년 민항기사건을 잘 알고 있었어요. 처음엔 불안해하다가 우리측의 후대에 별 위험이 없는것을 알고는 오히려 『민항기승객들에게는 관광을 시켜주는등 여러가지로 후대한 것으로 아는데 왜 우리에겐 관광을 안시켜주느냐』고 불평을 했다고 해요.
-모두들 20세 안팎의 젊은이들인데 호텔방에만 있자니 우리취재진들이 답답했더만큼이나 갑갑하기도 했을 거예요.
-부상자 곡진피와 장유공의 치료과정에도 화제가 많았지요. 이들 두 승무원의 치료비는 외국인으로서는 국내최초로 의료보험 수가를 적용했습니다. 병원비는 수술비25만원씩 50만원등 5일동안 1백30만원이 나왔으나 해난사고등 비상사태때 외국인에게 적용되는 군산의료원의 의료보험수칙의 혜택으로 1백5만원으로 할인돼 관계기관에서 지불했읍니다.
-곡등은 수술받은 이틀째부터 외부에서 중국음식을 시켜먹다 의료진의 정성어린 치료에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인지 25일부터는 『외부에서 시키는 비싼 중국요리를 먹지않겠다』고 말했다더군요.
-곡등은 5일동안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으면서 의료진과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했는데 곡등이 중국식 약자를많이 써 제대로 이야기가 통하지 않아 애를 먹기도 했지요. 한 간호원은 아예 중국어 교본을 준비해 필요할때마다 펼쳐보기도 했읍니다.
-한 의사는 곡이 활달하고 속마음을 털어 놓았지만 법원을 떠나는날 군산시청에서 선물로준 점퍼를 입으라고 하자 입고 돌아가면 목이 달아난다는듯 손을 목에 대보이면서 끝내 군복을 입고 나가는것을 보고 공산세계의 경직성이 느껴졌다고 전했읍니다.
-사망자 유해를 넣은 목관도 갈색 옻칠을 한 특A급으로 개당 45만원씩이나 되는것입니다. 이는 병원측이 「중국인은 어느곳에서 죽든 최고의 관을 쓰고 고향에 묻힌다」는 풍습에 따라 베푼 호의였지요.
-가장 바빴던 사람들중에는 군산관광호텔의 교환양 2명이 있습니다. 하루30∼40통화에 불과하던 시외통화가 승무원들 투숙후 1백50∼1백60통화로 4배로 늘어나 둘이서 교대근무하던것을 24시간 동시근무를 했답니다. 교환양은 『너무 바빠 이틀동안 세수조차 못했다』고 실토하면서도 국가적인 큰일에 일조를 하는 보람으로 피곤을 이겼다고 말해요.
-이번 사건으로 당국이 호텔측에 지불해야하는 비용은 객실사용료 2백50만원과 식대등 총5백만원이 나왔습니다. 이가운데 승무원들이 투숙한 방9개의 객실료는 관계기관에서, 나머지는 군산시에서 부담키로 했읍니다.
-이번과 같이 한국이 관련된 국제적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겪는 일이지만 이번에도 사건발생사실이 한국정부의 발표보다는 외신들에 의해 훨씬 앞서 보도됨으로써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읍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