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세상 속으로] “나중에 아이 낳기 힘들까 봐” 미혼여성 난자 냉동 시술 늘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러시아어 프리랜서 통역가인 전미라(40)씨는 오랜 고민 끝에 지난달 서울의 한 난임센터를 찾았다. 자신의 난자(卵子)를 냉동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난자 냉동’은 여성의 몸에서 난자를 채취해 극저온에서 얼려둔 뒤 원하는 시점에 해동해 임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시술이다. 25세에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 10년간 공부에 매진했던 전씨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통역일에만 매달린 ‘워커홀릭(일 중독자)’이었다. 이 때문에 연애와 결혼은 늘 뒷전이었다. 그러던 전씨가 난자 냉동 시술을 결심한 건 친구가 임신이 되지 않아 고통을 겪는 걸 지켜보면서다. 30대 후반에 다소 늦게 결혼한 친구는 몇 차례의 인공수정과 시험관 아기 시술 등에도 불구하고 3년째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다. 전씨는 “아직 결혼과 출산 계획은 없지만 나중에라도 좋은 짝을 만났을 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고 말했다. 전씨는 난자 14개를 냉동해 뒀다.

만혼시대 늦깎이 출산 대비 새 풍속도

차병원 작년 128명 시술, 2013년의 4배
35세 이상 여성이 10명 중 7명
검사·채취·보관비용 1회당 300만원 선
냉동 후 빨리 임신 시도하는 게 좋아

만혼(晩婚) 시대가 도래하면서 미혼 남녀들이 결혼 전부터 늦깎이 출산에 대비하는 새로운 풍속도가 등장하고 있다. 미혼 여성들의 난자 냉동 시술이 대표적이다.

기사 이미지

차병원 여성의학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이 연구소에서 난자를 냉동한 여성은 128명으로 2013년(30명)보다 4배 넘게 늘었다. 연령별로는 35~40세가 36%로 가장 많았고 40세 이상도 35%나 됐다. 30~35세는 15%, 30세 미만은 14%였다.

기사 이미지

차병원 난임센터의 김유신 교수는 “최근 3년간 난자를 냉동한 220여 명 중 60~70%가 미혼 여성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과거엔 암이나 백혈병 등 질병으로 인한 방사선 치료를 앞둔 환자나 시험관 시술을 하려는 기혼 여성이 난자를 보관하는 게 대부분이었다면 최근엔 난임에 미리 대비하려는 미혼 여성이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은 한국 남녀의 결혼 연령이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는 것과 맞물려 있다. ‘결혼적령기’를 딱히 특정하기 어려울 정도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이 32.6세, 여성은 30.0세로 남녀 모두 처음으로 30대에 진입했다. 20년 전에 비해 무려 4.2세(남)와 4.7세(여)가 증가한 수치다. 김혜영 숙명여대 정책산업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의 평균 초혼 연령은 10년마다 두 살씩 늦어지고 있으며 이는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 같다”고 예상했다.

문제는 인간이 자녀를 낳기 좋은 생물학적 적령기가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특히 여성의 경우 가임력(임신할 수 있는 능력)이 나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여성의 난소는 20대에 가장 기능이 활발하며 30대부터 기능이 서서히 떨어지다 평균 37세를 전후로 눈에 띄게 퇴화한다. 결혼 전부터 미리 출산에 대비하는 여성이 늘어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기사 이미지

서울역 인근의 차병원 난임센터에는 ‘바이오탱크’로 불리는 난자 보관 탱크 6대가 있다. 지름 1m, 높이 1.6m 크기의 탱크에 질소가 유입되면 온도가 극저온인 영하 200도까지 떨어진다. 필요할 때 이 난자를 해동해 인공수정을 거쳐 임신을 하게 된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냉동 난자 10년 이상 보관 가능=지난달 30일 찾은 서울역 인근의 차병원 난임센터 2층. 유리문에 ‘37난자은행’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는 공간 안쪽으로 ‘바이오탱크’라고 불리는 난자 보관 탱크 6대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37난자은행은 여성의 난소 기능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나이 ‘37세’에서 따왔다. 지름 1m, 높이 1.6m 크기의 이 탱크는 배관을 통해 대형 질소통과 연결돼 있었다. 질소통에 들어 있는 슬러시 질소 가 배관을 따라 탱크 안으로 유입되면 탱크 내 온도는 영하 200도까지 낮아진다고 한다. 차병원 난임센터 마케팅부 이광명 주임은 “탱크 한 대에 여성 2000여 명의 난자가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기사 이미지

세계적으로 난자 냉동에 주로 사용하는 기술은 ‘유리화 동결법’이다. 난자의 수분을 제거한 뒤 질소로 급속 냉동시켜 딱딱한 알갱이 형태로 보존하는 방식이다. 임신을 원할 땐 냉동해 둔 난자를 상온에서 해동하면 된다. 해동한 난자에 미세한 바늘로 정자를 주입하면 인공수정이 되고, 이 수정란을 자궁에 착상시키면 임신이 된다.

이날 미혼 직장인 김모(36)씨는 냉동 시술 사전 검사를 위해 센터를 찾았다. 호르몬 측정을 위한 혈액 검사와 초음파 검사다. 검사 결과 난소의 상태가 좋지 않아 채취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면 시술을 미뤄야 한다. 검사 후 김씨는 “3개월 전 난소 기능이 좋지 않다고 나와 재검사를 받았는데 이번엔 결과가 잘 나와 다행”이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검사 결과가 잘 나와도 시술 과정은 간단치 않다. 먼저 생리 시작 직후부터 평균 6~9일간 매일 과배란 유도 주사를 배에 스스로 놓아야 한다. 투여가 끝난 날로부터 이틀쯤 뒤 채취 시술을 받는데 얇은 바늘로 난소에 있는 난자를 흡입하는 방식이어서 심한 통증이 올 수 있다. 보통 30대 여성에게선 평균 5~20개의 난자가 나오는데 최대한 전부 냉동해 둔다. 향후 해동 과정에서 20~30%가 소실될 수 있기 때문이다. 채취 시술시간은 10분 정도다. 비용은 검사·채취·보관까지 합쳐 회차당 300만원 선이다. 보관기간과 중도 해동 여부에 따라 추가 비용(30만~50만원)이 발생할 수 있다.

독일이 세계 최초로 난자 냉동에 성공한 1986년 이후 현재까지 1000여 명의 아기가 냉동 난자로부터 태어났다. 이젠 유전자 검사를 통해 난자의 염색체를 재배열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기사 이미지

냉동 기술도 꾸준히 발전했다. 오랫동안 난자를 냉동해도 일반 난자와 수정성공률 등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게 임상으로 확인됐다. 심지어 폐경 여성도 냉동 난자로 인공수정한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만 잘되면 임신이 가능하다고 한다. 다만 자궁 역시 나이를 먹을수록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유산 확률이 커지는 편이다. 제일병원 난임생식내분비과 박찬우 교수는 “난자를 약 10년간 얼려놔도 문제가 없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며 “하지만 자궁과 호르몬 등도 나이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가급적 빨리 임신을 시도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정자 냉동’하는 남성도 증가=여성은 정해진 숫자의 난자를 가지고 태어나 매달 월경 시 배출하다가 폐경을 맞는 반면 남성은 사실상 평생 정자를 생성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만혼에 대비해 정자를 냉동하는 남성도 늘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정자의 유전자 변이가 증가할 수 있기에 젊었을 때 건강한 정자를 확보해두려는 이유에서다. 대기업 직원 이모(43)씨는 “결혼은 늦게 하더라도 건강한 손주를 꼭 보게 해달라는 부모님의 간청에 지난해 말 정자 냉동 시술을 했다”고 말했다.

정자 채취 과정은 난자에 비해 쉬운 편이다. 기본 검사를 받은 뒤 병원이나 집에서 소독된 용기에 정액을 받으면 된다. 단 병원 밖에서 채취할 경우 한 시간 이내에 병원에 와야 하고 가급적 보관 온도를 20~37도로 유지해야 한다. 채취한 정자는 난자와 같은 방법으로 냉동된다. 가격은 1회차에 30만~50만원 선이다. 2007년 호주에선 냉동 정자와 냉동 난자의 수정을 통해 아기가 태어난 바 있다.

구글 등 일부 기업은 직원의 정자·난자 냉동비용을 회사 복지 차원에서 지원하기도 한다. 만혼에 따른 출산율 저하를 ‘사회적 손실’로 보고 이를 복지문제로 수용한 것이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증가하고 고용이 불안정한 현대사회에서 결혼을 미루는 현상은 어쩌면 당연하다”며 “하지만 만혼은 저출산 및 그로 인한 생산 가능인구 감소 같은 사회문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개인과 사회 양쪽에서 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
다”고 말했다.

“젊고 아름다운 모습 남기자” 싱글 웨딩촬영도 인기

기사 이미지

결혼하지 않아도 혼자 웨딩드레스나 턱시도를 입고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싱글 웨딩 촬영’이 미혼 남녀 사이에서 인기다. [사진 추상연스튜디오]

만혼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싱글들을 위한 틈새시장도 생겨났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결혼을 하지 않아도 혼자 웨딩드레스나 턱시도를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싱글 웨딩 촬영’ 업체다. 신랑·신부가 결혼식 전 혼인을 기념하면서 스튜디오에서 함께 찍는 보통의 웨딩 촬영과 달리 여성 또는 남성 혼자서 예복을 입고 찍는다. 소품이나 포즈에 제약이 없어 개성 있게 찍을 수 있다고 한다.

최근 3년 사이 생겨난 싱글 웨딩 촬영 업체는 현재 전국 20여 곳에 이른다. 영국 BBC방송은 지난 1월 ‘한국 신세대(next generation)는 결혼을 피한다’는 기사에서 이 같은 트렌드를 소개하기도 했다. 기사에는 “한국에서 미혼 여성이 혼자 드레스를 입고 촬영하는 것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싱글 웨딩 촬영비용은 500달러(약 60만원)로 일반 웨딩 촬영비용의 4분의 1 수준”이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싱글 웨딩 촬영 전문업체 추상연스튜디오의 연제호 마케팅팀장은 “한 달에 7~8명 정도의 싱글이 웨딩 촬영을 하러 온다”고 설명했다. 그는 “서른 살을 앞둔 20대 중·후반의 여성들이 현재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웨딩드레스와 함께 남기고 싶어 찍는 경우가 가장 많다”며 “남성들은 턱시도보단 다양한 옷을 입고 화보식으로 촬영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천권필·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