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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기업인 헌신이 성사 주춧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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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북한 참가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대구 유니버시아드(U)는 어떻게 유치되었을까.

그 과정은 요즘 '김운용 IOC 부위원장 훼방설'로 번지고 있는 동계 올림픽과는 사뭇 달랐다. 한 향토기업인의 헌신이 U대회 유치의 주춧돌을 놓았기 때문이다.

대구에 U대회를 유치하자는 논의는 1995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무주는 97년 동계U대회를, 부산은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상태였다. 당시 대구시체육회 상근부회장을 맡고 있던 우방 이순목 회장과 경북체육회 박상하 상근부회장이 "우리도 국제스포츠행사를 유치하자"는데 뜻을 모은 것.

두 사람은 '2001년 하계U대회'를 대구.경북이 함께 유치키로 하고, 문희갑 대구시장과 이의근 경북지사에게 건의했다. 대구경북개발연구원은 U대회 효과를 분석하고, 96년 봄 '2001년 하계U대회 유치위원회'가 결성돼 이회장이 위원장을 맡았다. 경기장의 위치와 규모가 결정되고 FISU(국제대학스포츠연맹)엔 곧바로 유치 의사가 전달됐다.

97년 2월 무주 동계U대회는 유치 활동의 호기였다. FISU 위원 전원이 한국을 찾은 것. 이순목 유치위원장 등은 당시 무주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이들을 상대로 유치전을 펼쳐 FISU 위원 등 20여명을 대구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대구의 한 호텔에서 환영행사가 이어졌고, 행사 끝에 참석자 전원은 2001년 대구 개최를 구두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이순목 우방 전 회장은 "당시 참석자 전원과 러브샷을 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며 "무주 U대회 덕분에 경제적인 유치가 가능했다"고 회고했다.

얼마 뒤 1차 초청에 빠진 FISU의 킬리안 부위원장(현 위원장) 등 20여명이 다시 대구를 찾았다. 이들도 대구 지지를 약속했다. 대구 유치는 확정된 셈이었다. 6억여원에 이른 그간의 경비는 전액 유치위원장이 떠맡았다.

이씨는 "대구의 획기적 발전을 위해 96, 97년은 회사 일도 제쳐 둔 채 행사 유치에 매달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순탄하던 유치 활동은 97년 11월 닥친 IMF 외환위기를 만났다. U대회 개최의 정부 승인을 앞둔 때였다. 98년 4월 김대중 대통령은 대구를 방문해 유치 재검토를 요청했고, 유치는 중단됐다.

활동이 재개된 것은 2000년 4월 총선때. 정부는 다시 유치 지원을 약속했다. 2003년 U대회 유치위가 다시 결성되고, 자금 압박을 받던 이순목 전 회장 대신 박상하 부위원장이 위원장을 이어받았다. 쌓은 공은 헛되지 않았다.

2000년 7월 베이징 하계U대회 집행위에서 마침내 대구가 개최지로 결정됐다. 그러나 한달 뒤 우방은 IMF의 거센 파고를 넘지 못한 채 부도가 나, 이순목 회장은 졸지에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 이후 그의 노력도 잊혀졌다.

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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