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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지금 바그다드에선] 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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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미군이 바그다드에 입성한 4월 9일 그날, 바그다드 함락을 세계인들의 머리 속에 가장 깊이 각인시킨 것은 시민들이 피르두스 광장에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거대한 동상을 끌어내리는 장면이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후세인의 폭정에 고통받던 사람들이 돈을 모아 만든 초록색의 가족상(像)이 들어섰다. 아버지.어머니.어린이의 한 가족이 초생달과 태양을 이고 서 있다.

초생달은 이슬람을, 태양은 밝음을 상징한다. 밝은 미래로 나가자는 의미다. 그러나 동상 받침대에 누군가가 큼직하게 영어로 이런 낙서를 해놨다.

"모든 게 끝났다. 미국으로 돌아가라." 바그다드 함락 1백일을 앞둔 지금, 미국이 겪는 시련과 이라크인들의 딜레마를 정확히 표현한 글이 아닐 수 없다.

이라크의 지식인들은 미국의 침공에 의한 후세인의 제거를 기정사실로 인정한다. 그러나 이라크 침공의 표적이 사라진 지 석달이 지난 지금도 장갑차와 전투용 지프로 무장한 미군이 바그다드 시내를 순찰하고, 주요 호텔과 박물관,대학 캠퍼스와 바빌론 같은 유적지를 지키면서 드나드는 사람들의 몸을 철저히 수색하는 현실에는 반발한다.

바그다드 대학 정치학 석사과정의 학생 칼리드 알하리시(27)는 상아탑에까지 미군이 주둔한 데 자존심을 크게 상했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도 치안유지가 안돼 통행금지를 실시하고 있어요. 우리는 후세인 정권의 붕괴로 자유를 누리고 있기에 지금은 미군 주둔을 용인하지만 앞으로는 단 한명의 미군도 남아서는 안됩니다."

알하리시는 미국의 후세인 제거는 쿠데타이고,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군이 이라크인의 임시정부를 세우는 데까지만 개입하고 빨리 떠나지 않으면 미군에 대한 자살공격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빨리 임시정부를 세워 뒷일을 이라크인들에게 맡기고 떠나야 한다는 데는 스승과 제자 모두 이구동성(異口同聲)이다. 세대차는 그렇지 않을 경우 이라크인들의 대응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학생 알하리시는 죽음도 불사(不辭)하는 저항을 각오하는 반면 그의 스승인 정치대학장 리야드 하디 박사는 미군이 임시정부 수립까지만 개입하고 떠나야 하지만 떠나지 않을 때라도 폭력투쟁은 반대라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보다 더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라크 최대의 신문인 알 자만의 편집국장 나다 샤우카트(50)여사는 지금 미군이 철수하면 당장 무질서가 초래된다고 말한다. "일부 이라크인들은 너무 성급하게 미군 주둔의 현실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라크인들은 후세인 제거가 조지 W 부시 정부의 이라크 침공의 최종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미국은 후세인 제거로 이라크에 미국식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체를 이식(移植)하려고 한다.

그 도미노 효과로 중동지역 전체의 질서를 미국의 전략적.경제적 이익에 맞고 이스라엘의 안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개편하려는 것이다. 석유자원의 확보도 그중의 하나다.

미국은 결코 추상적인 승리의 깃발을 들고 이라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이라크인의 정서와 미국의 정책목표가 충돌할 수 있다.

바그다드 도착 전에 이라크의 무정부상태를 알 수 있다. 요르단의 암만에서 이라크 입국 비자를 받으려고 해도 이라크 정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서 비자 없이 국경을 넘었다.

요르단.이라크의 국경 검문소는 미군이 지킨다. 이라크인들을 직원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며칠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입국자들은 섭씨 45도의 용광로 같은 태양 아래에서 두세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이라크의 통금은 밤 11시에서 새벽 5시까지이나 치안부재로 이른 저녁시간부터 거리는 한산하다. 차량으로 요르단에서 입국하는 사람들과 요르단 쪽으로 출국하는 사람들은 몇대씩 무리를 지어 이동한다. 바그다드에서 1백50㎞정도 벗어나야 안심할 수 있다.

언제 어디에서 총 든 강도를 만날지 모른다. 지금 이라크인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말이 "알리바바"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들'의 그 알리바바다.

지금 미국이 당면한 가장 급한 문제는 세가지다. 치안을 회복해 민심을 달래고, 심각한 전기와 물 부족을 해결해 보다 나은 생활을 보장하고, 이라크인들의 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이라크와 요르단을 잇는 도로에는 유조차를 포함해 수송차량의 물동량이 많다. 많은 기초 생필품들이 수입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미 군정은 올 연말까지 모든 수입상품에 관세를 물리지 않기로 했다. 세금도 없다.

세금을 받을 국세청이 없어진 것도 원인이지만 미 군정은 물가를 낮추고 생필품 수입을 장려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무관세.무세금 정책을 쓴다.

그래서 대부분의 상점엔 물건이 가득하다. 전쟁 전에는 2백50달러나 하던 텔레비전 한대가 지금은 1백70달러로 내렸다. 전자제품 판매점 주인 아마르 안투완은 "세금이 없는 덕에 매출이 전쟁 전보다 70% 정도는 늘었다"고 말했다.

알라위야 산부인과 병원도 서둘러 낡은 의료기기를 새것으로 바꾸고 있다. 이 병원의 접수창구 직원 모하마드 카딤(33)의 월급은 전쟁 중에는 단돈 2달러였지만 지금은 크게 올라 60달러나 된다.

정부가 없어 우선 공무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일반 회사들도 마찬가지다. 미 군정은 궁여지책으로 공무원들에게 한달에 30달러 정도의 봉급을 준다. 퇴역군인들에게도 월급을 주기로 했다.

공무원들은 옛 직장에 나와 몇시간씩 잡담을 하다가 '퇴근'한다. 가장 급한 것이 석유 생산인데 1991년 걸프전쟁 이전의 수준인 하루 2백50만배럴을 생산하려면 3년 동안 50억달러를 투자해야 한다는 계산이다. 현재는 국내수요를 채우고 약간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다.

최고의 난제는 과도정부 수립이다. 폴 브레머 행정장관은 지난 5일 기자회견에서 2주 안에 이라크인들로 통치기구를 구성한다는 계획을 확인했다.

거기서 임시정부의 장관을 추천한다. 미국은 전국적으로 수백명과 물밑 접촉을 하면서 사람을 고르고 있다. 여러 세력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다. 그러나 미국은 친미적인 사람들로 통치기구를 구성하고야 말 것이다.

제헌회의의 구성과 기능도 간단치가 않다. 미국은 정치체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할 것인지 의원내각제로 할 것인지는 이라크인들의 결정을 따른다고 말한다. 원칙적으로는 옳은 말이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공목표를 손상할 위험이 있는 체제는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임은 확실하다.

보편적인 가치라는 고상한 이름의 미국식 정치.경제체제를 옮겨다 심는 원칙에는 털끝만큼의 양보도 없을 것이다. 미국은 전승국 행세를 하는데 이라크인들은 패전국 시민임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이라크 문제의 알파요, 오메가다.

바그다드=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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