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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활력 죽이는 공무원의 옥새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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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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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논설위원·경제연구소장

세종청사의 퇴근은 빠르다. 교통체증이 시작되기 전 수도권행 버스에 몸을 싣기 위해서다. 한바탕 퇴근 바람이 지나면 사무실은 텅텅 비면서 청사는 적막에 휩싸인다. 밤을 밝히며 야근하는 공무원들로 넘쳤던 과천청사나 개발연대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다. 이런 차이는 귀가전쟁 때문으로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본질은 다른 데 있다. 정보와 두뇌, 자금에서 정부의 역할이 확 줄어든 데서 비롯되고 있다. 경제를 민간이 주도하면서 공무원이 한국 사회를 이끌 능력도 열정도 필요성도 모두 줄어든 결과다.

이제 100만 공무원의 역할은 무엇일까. 규제의 다른 이름인 옥새(玉璽) 지키기 정도가 아닐까 싶다. 옥새는 임금의 도장이다. 이 옥새가 찍히지 않으면 나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공무원은 법률에 따라 옥새 찍는 일을 대행한다. 정부가 국가경제를 이끌던 시절에는 규제의 역할과 효용이 컸다. 전지전능한 정부가 경제개발 계획에 따라 필요한 제도를 만든 뒤 민간에 정보와 자금을 제공하고 투자 업종에 대한 교통정리를 통해 경제성장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규제가 민간의 발목을 잡고 있다. 오락가락하는 면세점 정책이 단적인 사례다. 일본이 즉시환급 사후면세점을 4000개에서 3만 개로 늘리고 시내 면세점을 도입해 관광산업의 경쟁력을 높였다. 이때 한국은 정상 영업하던 시내 면세점 두 곳의 문을 닫게 했다. 문제점이 지적되자 시내 면세점 허가를 다시 확대하기로 했지만 올해 도입한 즉시환급 사후면세점은 130개에 그치고 있다. 3만 개와 130개의 경쟁에서 어느 쪽이 이길지는 불 보듯 뻔하다. 이런 무능 사례는 열거하면 한이 없다.

한국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분야는 규제가 없다. 바둑을 잘 두고 K팝과 여자 프로골퍼가 세계를 휩쓰는 걸 보면 모두 ‘규제 프리’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분야는 오로지 재능과 창의만이 기준이다. 규제가 따로 필요 없다. 그런데도 공무원은 규제를 꼭 움켜쥔 채 놓으려 하지 않는다.

이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 스티글러가 포획이론으로 설명한 ‘규제의 먹이사슬’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공무원은 규제라는 옥새를 쥐고 있고 피규제자는 그 안에서 보호받으며 안주한다는 얘기다. 서로 공생하는 사이 부패가 진행되고, 위기가 찾아와도 혁신이 어렵다. 공무원 자신이 재직 중일 때는 조용하게 지나가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3년 카드 대란과 2011년 저축은행 사태가 터졌고, 앞서 “경제의 펀더멘털이 튼튼하다”면서 외환위기가 터졌다. 최근엔 조선·해운업이 벼랑 끝에 섰다. 부실 기업이 허위 정보를 제출하고 정부에 로비를 해도 현장을 잘 모르는 공무원은 구조조정을 미루고 자율협약이란 이름으로 구제금융을 제공해 수술의 때를 놓치고 병을 키워 버린 결과다.

현장 상황을 모르는 공무원의 손을 거치면서 대통령에겐 아름다운 보고만 올라간다. 대통령이 규제개혁장관회의를 통해 아무리 규제 혁파를 외쳐도 달라지는 게 없는 이유다. 공무원이 일하는 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정부가 민간의 현장 상황을 모르는 데서 비롯되는 ‘정보의 비대칭’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현장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 또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혁 법안을 내놓아도 국회가 발목을 잡아 정부가 일을 못한다고 책임을 국회로 돌려서는 안 된다.

그에 앞서 공무원이 먼저 변해야 한다. 규제는 공무원의 기득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년은 철밥통이고 연금도 탄탄하다. 그러니 젊은 ‘공시족’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규제는 마지막 잎새처럼 머지않아 대부분 사라질 수밖에 없다. 변화하는 산업환경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에 대응하려면 공무원은 차라리 옥쇄(玉碎)하는 각오가 필요하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민간을 돕고 지원하는 공복(公僕)으로 거듭나란 얘기다. 마지막 잎새에 불과한 규제를 빼앗길새라 꽉 붙잡으려고 해선 할 일을 찾기 어렵다. 민간의 조력자가 된다면 할 일이 넘쳐 세종청사에도 다시 밤늦게 일하는 공무원이 늘어날 것이다. 전문성과 경쟁력이 오히려 강화돼 다시 주도적으로 경제를 이끌 수 있다는 얘기다.

김동호 논설위원·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