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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중산층, 이번 총선은 ‘싸울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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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철근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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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Kill Bankers(은행가들을 죽여라)’ 다음주 국내 개봉되는 영화 ‘라스트 홈’의 주인공 데니스 내시(앤드루 가필드)는 은행대출을 못 갚아 집이 넘어가자 붉은색 페인트로 벽에 섬뜩한 낙서를 한다. 막노동까지 불사하며 열심히 일한 주인공에게 집은 험한 세파에도 가족을 지켜줄 ‘노아의 방주’ 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는 주택 담보대출을 연체하자 바로 홈리스로 전락한다. 2008년 미국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그린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

“미국에서 100명 중 단 1명만 방주에 탈 수 있어. 나머지 99명은 결국 물속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지.” 강렬한 대사는 이 영화의 원제가 왜 ‘99 Homes’로 지어졌는지를 상징하고 있다.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 자리를 노리고 있다. 가장 열성적인 지지세력은 백인 빈곤층이다. 이런 모순된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미국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해 왔던 중산층이 몰락했기 때문일 것이다. 트럼프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기 전 투자강연에서 한 방청객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투자에 실패해 은행의 압류통지를 세 번이나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은행을 찾아가 협상을 하세요. 그들은 이자를 깎아 주거나 원금 상환을 일부 유예해 줄 것입니다. 은행도 담보로 잡은 부동산을 처분해 봐야 좋은 가격을 받지 못할 테니까.” 그러면서 트럼프는 고정금리로 대출을 받아 집을 사라며 오히려 청중들을 부추겼다. 그러나 트럼프의 해답은 틀렸다. 금융기관들은 연체하면 가차 없이 채무자들을 집에서 내쫓았다. 반면 ‘방주’를 독점한 1%에 속하는 트럼프는 금융위기 후에도 자기 재산이 100억 달러를 넘는다며 큰소리를 치고 있다.

문제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의 망령이 한국에도 드리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이미 1200조원을 넘어섰다. 평균 가정은 1년6개월치 소득을 전부 쏟아부어야 빚을 갚을 수 있다. 더욱이 경기 침체로 직장에서 쫓겨난 베이비부머 세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국은 상위 10% 고소득층도 이자·임대수입 등 재산소득이 전체 소득의 5%에도 못 미친다. 괜찮은 연봉을 받던 중산층도 직업을 잃으면 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은행 빚까지 얻어 ‘몰빵’한 집값마저 떨어지면 미국 중산층을 붕괴시킨 한국판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막장 드라마를 펼친 정치권은 각각 가계부채 대책을 내놓았다. 강봉균 새누리당 선거대책위 공동위원장은 한국은행이 주택담보대출증권을 인수해 상환기간을 20년 장기분할로 전환하자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9번인 제윤경 주빌리은행 상임이사도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 연체 채권을 소각하자는 공약을 내걸었다. 하지만 파산법 전문가인 김관기 변호사는 “야당의 대책은 효과가 거의 없고, 여당도 미흡하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1930년대 대공황 당시 미국 정부가 했던 것처럼 상환기간을 연장된 수명만큼 50∼60년으로 대폭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일본의 경험에서 봤듯이 ‘거품’의 대가는 혹독하다. 이 고통을 모두 가계로 돌려서는 안 된다. 개인은 집값 하락으로 손해를 보기 때문에 이를 조장한 정부와 금융기관도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99%의 국민은 1%가 ‘방주’를 다 차지하지 못하도록 정치권에 요구해야 한다. 지역에 따라 ‘묻지마’ 투표를 할 게 아니라 어느 정치세력이 자신의 집을 지켜 줄지를 보고 심판해야 한다.

파산법 권위자인 엘리자베스 워런 하버드 법대 교수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정계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자서전 『싸울 기회』에서 상원의원에 출마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공짜 지원금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원하는 건 모두 공정한 몫을 치르는 나라, 모두 같은 규칙을 따르고 모두 책임을 지는 나라다. 우리는 그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싸움을 시작했다.” 그렇다. 벼랑 끝에 몰린 한국 중산층은 앞으로 이어질 총선·대선을 공정한 몫을 지키기 위한 ‘싸울 기회’로 삼아야 한다.

정철근 중앙SUNDAY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