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 학대는 소통 부재가 낳은 괴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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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호 29면

학기 초의 대학은 들썩인다. 강의실은 백화제방의 이야기 보따리로 자유분방하다.


그러나 질풍노도의 자기표현은 수업이 시작되면 실종된다. 강의계획을 설명하고 의견을 나누는 오리엔테이션 시간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의 바람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는 백지수표를 내걸어도 반응이 거의 없다. 간신히 과제와 성적에 대한 한두 명의 질의 정도. 정작 중요한 한 학기 농사를 결정짓는 수업 주제에 대해서는 무의견이다. 수업에서도 교수가 참여하지 않는 그룹토론은 잘 이뤄지지만 교수가 주도하는 전체 수강인원을 대상으로 하는 소통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수가 지명을 해야 진행될 정도다. 사실 교수와 학생의 소통 부재는 강의실에 한정되지 않는다. 대학사회의 전 방위에 걸쳐 똬리를 치고 있다. 학기 초가 되면 등장하는 신입생 학대는 소통 부재가 낳는 고약한 괴물이다. 새로운 기대와 각오로 출발하는 새내기들에게 폭력을 휘둘러 치명상을 입히고 기괴한 체벌로 좌절감을 안긴다. 부패한 막걸리를 새내기들의 온 몸에 뿌리고, 변태적 성추행으로 젊은 영혼을 파멸시킨다. 강제로 술을 먹이는 만행도 되풀이 되고 있다. 대학이 교수와 학생의 소통교육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결과다. 가슴에 지혜를 쌓는 교육은 등한시 하고 머리에 지식을 집어넣는 교육에 치중해온 탓이다. 이제 지식만능의 엘리트 교육은 주입식 교육방식에서 벗어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사람들과의 신뢰 관계를 중시하는 교육을 추구해야 한다. 소통교육을 통해 건전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가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외모와 생각에 차이를 지닌 구성원을 차별하지 않는 평등한 공동체를 위한 만델라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처럼 대학교육도 기능인 배출에 안주하지 말고 꿈을 좀 크게 꾸어야 한다. 대학에서 익힌 소통이 강물이 되어 사회로 흘러가게 해야 한다.


소통은 자신의 말을 단순히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여 상대의 행동과 상황을 통제하려고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소통으로써 낙제점이다. 소통은 갈등의 발생과 충돌을 당연시하면서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머리의 계산만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공감하는 가슴이 동반되어야 작동하는 어려운 과정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 걸리는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여행이라고 했다. 멀지만 머리와 가슴이 만나야 따뜻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말씀이리라. 우리는 얼마 전 ‘응답하라 1988(응팔)’이라는 드라마에 열광했다. ‘옛날과 옛날 것’에 대체로 무관심한 젊은 세대도 응팔로 몰려들었다. 무엇이 이들을 쌍문동이라는 옛날 골목에 살던 사람들의 사는 모습 앞으로 불러들였을까?


그건 따뜻한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웃에 대해 예의를 갖추고 인격적으로 대하고 가족과 골목 구성원들을 배려하는 소통의 안간힘과 눈물에 공감해서 일 것이다. 응팔이 보여준 사라져 가는 훈훈한 인간관계,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누는 행복감을 화면 밖으로 끄집어 낼 수는 없을까. 김수환 추기경은 ‘네 탓이 아니고 내 탓’이라고 했다. 따뜻한 소통으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을 자신부터 서두를 일이다.


김정기한양대?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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