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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다듬어만 달라고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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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호 34면

미장원 (美粧院) [미ː장원]


표준 국어사전 [명사] 파마, 커트, 화장, 그 밖의 미용술을 실시하여 주로 여성의 용모, 두발, 외모 따위를 단정하고 아름답게 해 주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집. [유의어] 미용소, 미용실, 미용원


그 여자의 사전 그 여자가 수십 개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곳. 매일 점심메뉴도 못 고르는 결정 장애인 그 여자로서는 가장 두려운 곳. “머리 기르실 거예요? 자르실 거죠?”“파마랑 염색도 해야겠는데요?”에서는 미래의 헤어스타일을 떠올리는 상상력과 내 주머니 사정을 빨리 계산해야 하며 “머리 더 헹궈 드릴까요? 물은 뜨겁지 않은가요?”에서는 최저임금을 받으며 머리를 감기느라 손이 부르틀 게 뻔한 인턴 직원에게 덜 부담이 가면서도 내 머리에 남은 샴푸를 다 떨궈내야 하는 최적의 온도와 시간으로 고민해야 하는 곳. 머리를 감을 때 손을 양옆으로 늘어뜨릴 것인가 다소곳이 배 위로 모아 올려놓을 것인가. 또한 커피냐 홍차냐, 주부잡지냐 패션잡지냐까지 선택은 끝이 없는 곳. 말하자면 그 여자의 패션과 미학적 취향과 경제력와 인권적 감수성까지 동원해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곳. 스트레스로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는 곳. 그러나 나올 땐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는 곳.


“살짝 다듬어만 주세요.” 나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다·듬·어 달라고. 그러나 뻔히 내 취향을 알면서도 “앞머리는 잘라야 겠죠? 옆머리는 귀 뒤로 넘기게 놔두고요”라고 물어보는 크리스 샘의 질문을 받으며 의자에 앉는 순간 언제나처럼 불안한 예감이 몰려온다. 그와 나의 취향 차이. 그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과 ‘밀당’이 벌어질 시간이다. 나는 커트의 순간순간을 거울로 모니터 하며 이번만큼은 내 스타일대로 만들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거울을 보는 순간 결정적 실수를 깨닫는다. 아차, 콘택트 렌즈를 끼고 왔어야 했어.


슬슬 말을 걸기 시작하는 크리스 샘. “적어도 3주에 한 번은 오셔야죠.”“두피가 많이 안 좋아요. 영양 좀 주셔야 겠는데요”로 은근 나의 무심함을 탓하며 기를 죽이기 시작한다. 이어 봄 날씨에서 직장 상사 뒷담화까지 한바퀴 대화가 빙 돌며 집중은 흩뜨려진다. 너무 수다 떨다가는 머리가 어디로 갈지 모르고 너무 무뚝뚝하면 불만 있다고 생각할 테니 나른하게 몇 마디 대답해야 한다. 내 뜻대로 머리를 잘라야 하지만 가위를 든 건 디자이너다. 잘 보여야 한다. 그러니 미장원에서는 세련된 외교력까지 필요하다.


그러나 ‘태양의 후예’ 송중기 이야기가 나오면서 나는 집중력을 잃어버렸다. 정신없이 “너무 멋있지 않아요”를 몇 번 주고 받던 사이, 흐릿한 내 시야 속으로 뭉텅뭉텅 잘려나간 머리카락들이 들어온다. 잘려나간 내 정체성, 내 섹시함, 내 자존심들이 가을 낙엽처럼 바닥에 뒹군다.


나는 곧 목을 조이고 있는 보자기를 탁 풀어헤치며 벌떡 일어나 “이게 아니라구욧! 몇 번을 이야기 해야 되요. 다·듬·어·만 달라구요!” 라고 외치는 나를 상상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가위를 들고 있는 건 디자이너다. 십 년 전쯤 읽었던 심미주의 소설에서 미용사가 자꾸 반항하는 미녀 손님을 미장원에 가두고 결국 목에 가위를 꽂은 뒤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켰던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며 마음을 달랜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소설 속 여자처럼 나는 미용사가 자신의 미학의 극단을 시험할 정도로 예쁘지도 않고 보아하니 디자이너 역시 그 같은 열정으로 불타오르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 이제 나의 미학과 자존심을 버리고 투항하자.


“어머 뒷머리 좀 보세요 너무 자연스러워요.” 안경을 끼고 거울 앞에 선 나. 이젠 미장원에서 마지막으로 얻을 수 있는 미덕, 체념과 인내를 배울 때다. 이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 1주일만 지나면 다 비슷해. 너무 괴롭다면 병 치료 때문에 머리숱을 다 잃어버린 이모와 자를 머리도 남아 있지 않은 벗겨진 머리의 직장 상사를 생각하자.


그리고 우정과 사랑을 다시 검증할 때다. 진정한 친구나 연인이라면 내 머리를 보며 “할리 베리 스타일인데? 아니 앤 헤서웨이인가?”라고 해줘야만 한다. 그러나 솔직해지자. 지금 내겐 교훈도 우정 따위도 다 필요 없다. 그냥 내 머리를 돌려달라고. 오늘 밤엔 분명 꿈속에서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전부 다시 붙이고 있는 상상의 나라로 빠져들 것 같다. ●


이윤정 ?칼럼니스트. 사소하고 소심한 잡념에 시달리며 중년의 나이에도 영원히 철들지 않을 것 같아 고민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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